버스 안에 김이 서려 창문밖세상이 온통 뿌여게 보였다. 잠바 안에 온기가 너무 감사하게 느껴지는 추운 날이다. 가끔은 평소와는 다르게 세상이 보일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러한 날이다. 모든 색깔들이 짖게 내 눈 안에 들어온다. 흐릿하게 보였던 것들이 선명하게 눈 안에 각인이 된다.
이런 날은 술이 먹고 싶어 진다. 그래야 피사체들이 일그러질 테니깐 그래야 숨이셔 질 것 같으니깐. 반듯한 무언가를 보면 난 힘이 든다. 이런 것도 병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만약 병이었다 하더래도 나는 고칠 생각이 없다. 어떤 병은 마음에 들기도 하니깐.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가 보다, 그려녀니, 뭐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런 성격 때문인지 한 직장에 20년째 근무를 하고 있다. 조그마한 중소기업의 공장생산직에서 일을 한다. 지금은 뜸하지만 누군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너 무슨 일해?” 그럼 나는 설명을 해준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고 이렇게 사용하는 걸 만들어하고 말하면 상대방은 말한다. “아~ 공장 다니는구나” 그럼 약간의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다시 누군가 물어오면 입이라도 안 아파야지 하며 짧게 답한다. “공장 다녀” 그럼 상대는 “뭘 만들어”라는 질문 한다. 그럼 난 끝이 뭔지를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말한다. 돌아오는 건 짧은 “음~”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럼 난 또 왜인지 작은 허탈감이 찾아온다. 이 허탈감의 성분이 무엇인지 몰랐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 돌아오는 고사성어 ‘자격지심’ 또 작은 허탈감이 찾아왔다.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과는 다른 종류의 강박이 나도 생기는 듯했다.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가끔은 내가 여기서 어떻게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을 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월급이 많아서도, 일이 편해서도, 직장동료들이 좋아서도, 아닌데 왜 나는 20년 동안 일했을까? 아마 익숙해서일 거다. 삐뚤음 한 의자를 처음 앉았을 때 너무 불편해 몸여기저기가 아프다 치면 누군가는 다른 의자를 사서 앉던지 고쳐앉던지 하지만 난 불편한 의자에 나 자신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난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이라는 아리송한 물음 표를 안은 체 살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지만 난 다르다고 말한 체 살았다. 지나간 20년을 생각하자면 후회가 영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말이다.
처음 노동을 하여서 돈이라는 대가를 지불받았을 때 어른이 되는 느낌이었다. 돈의 금액이 적고 크고 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지나니 사람들이 힘들었다. 학교생활과는 다른 인간관계의 성질 때문에 괴롭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가끔 TV에서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사이코패스라는 게 특출한 카테고리에 속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 무뎌지는 감정들이 쌓인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이코패스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니는 공장은 일이 어려운 게 없었다. 그 이야기는 누구나다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말의 ‘이퀄’은 사람들이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입사하고 지금까지의 스쳐 지나간 인간들만 해도 거짓말처럼 들리수도 있지만 만 명은 될듯했다. 하루에도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열대명씩와 아침에 몇 명 점심 지나고 몇 명 저녁 지나고 몇 명, 그렇게 며칠 있다 몇 명, 몇 주 있다 몇 명, 몇 달 있다 몇 명 이렇 사라져 같다. 날 괴롭게 했던 사람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사실 여길 오래다닌 이유가 밖에 나가 또 다른 그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10,20,30의 숫자가 바뀌면서 교체되어 가는 인간들을 보며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듯 나 또한 그들을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 달리 표현할 말은 없지만 당장 떠오르는 단어는 ‘일회용’이라는 것이 생각이 난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과, 마음이 자리 잡았다. 날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밥 먹듯 물 마시듯 자신의 말로 행동으로 인간들을 괴롭게 하였고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간 인간들을 재밌어했다. 그들의 진실과 과장에 극단적인 선택한 인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냥저냥 하루하루뿐이었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방법만 다를 뿐 똑같았다. 조용한 기계일 뿐이었다. 어떤 기계가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그 기계는 다친 사람이 싫어서 다치게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자기 할 일을 꾸준히 했을 뿐이다. 기계를 만든 존재들이 그렇게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위험하다는 경고문을 붙여두지만 때로는 융통성이라는 말로 그것을 방관하고 기계를 사용하다. 다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기계를 원망을 안 할 수는 없다. 다치게 했으니깐. 나를 쳐다보는 타인의 시선들이 물건을 보는 듯한 기분이 있다. 당현이 저기 있는 것 특별한 일이 아니면 언제든 거기 있는 것 처음 보고 계속보고 자신의 끝에도 있는 것이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것에 부정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런 눈에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나 또한 그들을 딱히 생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엔진 속에 있는 다섯 살 아이처럼 말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고착되어 간다. 나는 다를 거라는 환상 속의 말, 달라지지만 고착되어 가는 말 내게 소원이 있다. 내가 어릴 적 아무 곳에 가 어린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생각해야 많은 것들이 있지만 지금에 와 가장 진심으로 느껴지는 생각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빨리 아는 거’ 말로만 이해해서 안 된다는 걸 안다. 뼈저리게 라는 말처럼 자신의 어떤 감정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 때문에 온마음과 몸이 짜부라지는 고통이 느껴질 정도의 그런 것을 느껼을때만 알 수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면 조금은 나 자신이 납득하고 좋아했을 만한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을까?
피사체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 싫다. 그런 날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괜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런 날은 퇴근하자마자 소주를 마셔줘야 한다. 잠바 안의 온기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추우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