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 서점이 가야 할 방향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된 요즘 하버드 대학교 주변 카페는 인산인해다. 하버드대학교는 보스턴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한 번쯤 방문하는 필수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캠브릿지 안에서 글을 쓸 때마다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카페 체인점 Tatte는 하버드 대학 지점만큼은 '보류'한 상황이다. 하버드 지점은 2층까지 있어 다른 지점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큰 편임에도 평일 아침부터 사람이 가득 차 있어 앉을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버드 대학 주변 한산한 카페를 찾다가 'Lovestruck Books'라는 동네 서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작년 12월에 오픈한 신상 서점인데 서점 한편에 작은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카페로 운영되다가 저녁에는 와인과 간단한 안주도 곁들일 수 있는 와인바로 변한다.
카페와 서점의 경계가 없어 운영 시간 내내 차분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은 이곳의 강점이다. 무엇보다 서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저녁 9시(!)까지 운영된다는 게 가장 매력적이다. 하버드대학교 주변 카페는 대부분 오후 6~7시면 문을 닫아 저녁 늦게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쓸 곳이 마땅찮다.
유리창 너머로 에스프레소 머신이 보이길래 멋모르고 들어간 서점이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빨간 책장을 포인트로 삼아 아기자기하고 경쾌하고 꾸며져 있었다. 책과 관련된 세련된 굿즈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 로맨스 소설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독립책방이다. 그것도 캠브릿지와 보스턴 지역 최초의 로맨스 서점이다. 지난 12월에 문을 연 이 책방은 연애물과 여성 중심의 소설 1만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서점에는 연애 소설 안에서도 세부 장르를 나눠놨다. 현대소설(contemporary), 스포츠 로맨스, 다크 로맨스, 역사, 판타지, LGBT, BIPOC(유색인종), 만화 등으로 분류해 진열해 놨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배려하는 미국이라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배경과 인종을 기반으로 한 로맨스물을 세분화해 또 하나의 니치 한 장르로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접하기 힘든 문화다.
캠브릿지의 'Lovestruck Books'는 사실 이 업계의 후발 주자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로맨스 독립 서점이라는 새로운 마켓을 형성한 곳은 'The Ripped Bodice'라는 곳이다.
'The Ripped Bodice'는 2016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로맨스 전문 서점으로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The Ripped Bodice'의 이름은 역사 로맨스 소설 보디스 리퍼(bodice ripper)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The Ripped Bodice'는 Koch라는 성을 가진 두 자매가 창업해 운영하고 있다. 자매는 킥스타터 캠페인을 통해 약 9만달러를 모금해 설립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브루클린(뉴욕)까지 지점을 내 입지를 넓혔다.
로맨스 소설이라면 유행처럼 번졌던 기욤 뮈소 작가의 몇몇 책만 읽었던 나로서는 '로맨스 전문 책방'이라는 개념이 생경했다.
로맨스 장르 하나만으로 책방 경영이 가능한 건가. 찾아보니 미국에서 로맨스 분야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설 장르 중 하나라고 한다. eBook과 오디오북 시장에서도 이 분야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소비자 분석업체 Circana에 따르면, 로맨스 소설의 연간 인쇄 판매량은 2020년 1800만부에서 2023년 3600만부로 최근 3년간 두 배 이상 증가하는 추세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최근 전문가들은 로맨스 장르가 특히 북톡(BookTok)의 인기 덕분에 큰 호응을 얻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북톡은 바이럴 틱톡(TikTok)의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홍보하는 방식이다. 해시태그 북톡(#BookTok)을 단 서평이나 독후감, 글쓰기 팁, 인기 소설 줄거리 정리 등 독서 관련 콘텐츠가 호응을 얻으면서 최근 출판 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로맨스 출판이 호황을 누리면서 로맨스 팬들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오프라인 매장을 더 많이 열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로맨스 소설을 전문으로 다루는 독립 서점들은 2020년 단 두 곳뿐에 불과했지만 2025년 현재 65여개로 집계된다고 한다. 로맨스 니치 마켓을 타깃 한 독립 책방은 미국에서도 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다.
로맨스 전문 서점의 최종 목표는 니치마켓을 노린 단순한 책 판매점보다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있다. 비슷한 독서 취향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책과 관련한 강의를 듣고, 작가를 만나고, 독서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 정서적 교감, 다양성 존중, 커뮤니티 형성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 'Lovestruck Books'에서는 매달 작가를 초대해 '독자와의 대화'와 같은 이벤트나 신간 출판 행사를 진행한다.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서는 독서 모임이 이뤄지기도 한다.
“I find romance in general to be a very hopeful genre,
and hope was something I really needed"
"로맨스는 전반적으로 아주 희망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정말 필요한 건 희망이었죠"
-가디언지 2024년 2월 14일 자 'Sexily ever after: how romance bookstores took over America' 기사에서 발췌-
로맨스 서점 외에도 미국에는 다양한 니치(niche) 분야를 다루는 독립 서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SF와 판타지, 호러 장르를 전문으로 다루는 서점, 원주민 문학과 예술 작품을 중심으로 한 서점, 이민자와 소수자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서점이 대표적이다.
한국에 있을 때 열심히 각 지역의 독립서점을 찾아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별다른 특색이 없었고, 다른 독립 서점과의 차별성을 느끼지 못해 굳이 다시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굿즈도 '예의상' 진열해 놓은 것처럼 보였을 만큼 지루하거나 질적으로 떨어졌다.
이때마다 결국 '답은 광화문 교보문고뿐이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어려웠다.
독서율 하락으로 대형서점과 독립서점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흐름이다.
그 가운데 살아남는 건 충성도 높은 독자층의 지지 아래 니치 마켓을 형성한 창의적인 몇몇 서점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런 니치 분야를 집요하게 파고든 서점이 아이콘처럼 부상한다면 무료하고 느슨해진 국내 출판 업계도 활력을 되찾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배우고 나누고 교류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버릴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의 취향 따라 살기 좋은 이 시대에 아날로그의 상징인 서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미련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