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마라톤 10K코스 도전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낯선 누군가가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무엇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매번 난감했다. 세상 가벼운 질문이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파고드는 것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은 '가끔 헬스하고 종종 넷플릭스 봐요' 정도. 이렇게 재미없는 답변을 뱉었다가 대화의 불씨를 꺼트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주변에선 와인, 위스키, 축구, 골프처럼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만한 개인사를 줄줄이 풀어놓는데 왜 나는 그런 게 없을까, 억지로 뭐라도 만들어야 하나 자괴감도 수번 들었다.
고백하자면 퇴근 후나 주말에 야구나 축구, 콘서트를 보러 간다는 주변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다. 기꺼이 경기장이나 공연장을 찾는 뜨거운 열정은 나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바쁘게 달아나는 시간을 저항 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주말에는 급속 충전을 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쉬기 위해 쉴 수 없었다. 잘못된 방법으로 쉬고 있었지만 어떤 게 문제인지 알 수 없었고 비효율적인 주말은 반복됐다.
건강 악화로 휴직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한 후에야 삶의 방향과 속도를 재정비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온전히 나와 배우자를 위해서만 보내고 있다. 당장 집안일과 배우자가 출근하는 것을 보조하는 것 외에는 바쁜 것이랄 게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잘 때까지 나를 크게 자극하는 외부 요인이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처음엔 여유로운 시간들에 거부감을 느꼈다.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나 둘 던져보고 있다. 답은 앞으로 더듬더듬 찾아갈 것이라 믿으며.
이르게 얻은 답변 중 하나는 달리기. 1년 정도 러닝을 했다가 일이 바빠지면서 그만둔 것이 항상 아쉬웠는데 보스턴에 와서 그 불씨가 살아났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는 한국에선 매일 새벽같이 나가 오후 9시가 넘어 들어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또 임신 준비를 위해 PT를 시작했지만, 바쁜 스케줄과 부족한 체력 탓에 일주일에 2번 가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헬스장에 가더라도 방전된 상황이라 운동 효과는 크지 않았다.
기계적인 운동만 반복해온 우리에게 보스턴의 러너들은 자극제가 됐다.
이 도시를 떠올리면 강렬하게 떠오르는 키워드가 마라톤인 것처럼 이 도시에서는 러너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풀코스 마라톤의 핵심 코스인 찰스강 주변은 물론이고 도시 곳곳에는 언제나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폭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져도, 4월 한낮에 눈이 내려도 이곳 사람들은 뛴다. 보스턴 마라톤은 세계 6대 마라톤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됐다.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거리는 활기를 띠고 있다. 거리 곳곳에 보스턴 마라톤을 홍보하는 깃발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시민들의 건강한 에너지를 직접 마주하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이 발동했다. 이건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도 아니고, 운동을 해야 만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하고 싶은 마음,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러닝에 소질은 없다. 무릎이 좋지 않아서다. 10대 때 잘 타던 스키 대신 스노보드로 갈아타보려 했다가 무릎으로 여러 번 넘어진 것이 후유증이 남아있다. 등산에 가도 하산할 때는 무릎 통증이 있어 반드시 스틱을 짚고 내려와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삐끗해 발목도 약하다.
여러 이슈로 풀코스는 꿈도 꾸기 어렵지만, 단거리에서도 충분히 즐겁게 뛰고 있다. 컨디션을 세밀하게 조절하며 달리고 있는데 서서히 기록이 나아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몸도 점점 가벼워지고, 무엇보다 밥 맛이 좋다. 성취감도 커서 운동이 끝나면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주체적인 '나'가 된 것 같아 잠깐은 그 기분에 취한다.
올해는 보스턴에서 지내는 기념으로 추억을 하나 만들고자 배우자와 함께 보스턴 10K 마라톤에 참여할 계획이다. 보스턴에서 풀코스 마라톤은 매년 4월에 진행되는데 이 경기의 서브 행사처럼 5K, 10K 마라톤이 열린다. 6월에 열리는 10K 마라톤은 참가인원은 1만명으로 제한돼 있다. 제한 시간은 2시간. 찰스스트리트에서 시작해 찰스강을 따라 뛰다가 다시 찰스스트리트로 돌아와 끝나는 코스다.
나는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나와 달리 승부욕이 강한 배우자는 목표한 시간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 중이다.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10K에 도전하는 우리이지만, 결승점에서는 마음 속 뜨거운 무언가를 똑같이 느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