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미국에 있는 기간 동안 영어 회화를 연습하고 싶어 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ELS 수업을 듣기로 했다. 교육센터는 캠브릿지의 한복판인 하버드 대학 바로 근처에 있다. 접근성이 좋다 보니 처음 수업을 등록할 때 당연히 학생들이 붐빌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수업의 정원은 겨우 10명. 늦장을 부렸다간 조기 마감이 돼 한 학기를 공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수강 신청을 서둘러 마쳤다. 얼마 전 캠브릿지 도서관에서 하는 무료 ESL 수업에 갔는데 좁은 교실에서 30명이 넘는 학생들과 촘촘히 붙어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어 더 조바심이 났다.
수업 시작을 이틀 앞둔 어느 날 뜻밖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가 들으려 했던 토론 클래스가 정원 미달로 폐강됐다는 소식이었다. 이메일에는 수업이 취소돼 유감이다는 말과 함께 해당 수업과 비슷한 다른 수업을 들을 것으로 추천했다.
새로운 수업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고민하다 늦게 답장을 하면 정원 안에 들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몇 시간 뒤 교육원에서 새로운 반 등록이 완료됐다는 형식적인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렇게 참석한 수업의 첫날, 선생님을 제외하고 총 5명의 학생이 들어왔다. 10명의 정원 중 절반이 찬 것이다. 폐강된 수업으로 어쩌다 흘러온 나를 제외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인원이다.
생각보다 붐비지 않아서 내심 좋았다. 토론 수업엔 오히려 적합한 인원이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의 첫인사는 이랬다.
"이번 학기는 정말 이상하네...참 이상해...학생수가 확실히 많이 줄었어. 수업도 여럿 취소되고 말이야. 아마 대학교들이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under pressure) 그런 건지..."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더 언급하지 않고 곧장 수업을 시작했지만,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교육원의 ELS 주요 수요층은 주변 대학에 진학한 이를 따라 미국에 온 가족 구성원들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다. 선생님은 이번 학기 특히 줄어든 학생수가 최근 유학생들과 그 가족의 불안정한 신분 문제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본 것 같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으로 매사추세츠주 전역 대학 캠퍼스에서도 유학생들의 비자가 취소되면서 유학생들 사이에서 불안이 커지고 있다.
지역 언론들도 하버드와 MIT, 터프츠대학교 등 연쇄적으로 유학생들이 비자가 취소되는 소식을 늘어나는 숫자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최근 매사추세츠주 내 대학에서만 20명 이상의 학생, 졸업생들이 비자가 취소돼 불법 이민자 신세가 됐다고 한다. 비자가 취소된 학생들은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다. 추방되거나 자국으로 돌아가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학생도, 대학도 비자가 왜 취소됐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학생은 어떤 이유에서 미국에서 떠나야 하는지, 학교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구성원을 잃어야 하는지 명확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행정부와 이민 당국이 현 정부의 기조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인 유학생을 제재하려는 강한 압박의 일환이라고 보고 있다.
중동 분쟁을 두고 지난해부터 주요 대학가에서 이스라엘 반대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에서도 대학들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에는 터프츠 대학에서는 친팔레스타인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튀르키예 유학생을 구금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 학생의 인권 보호를 위해 하버드 교내까지 석방 시위가 퍼지자 하버드 대학은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최근 캠퍼스 내 외부인 출입 통제에 나섰다.
교육산업은 의료, 과학 기술 서비스와 함께 매사추세츠 주를 굴러가게 하는 3대 산업이라 지역에서 교육 현장의 변화에 특히 민감히 반응하고 있다. 보스턴에는 하버드나, MIT 등에 진학을 하는 학생뿐 아니라 이 시대 주류 석학들, 연구원들이 전 세계에서 몰린다. 낯선 나라에서 이들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인 비자를 현 정부가 쥐고 흔들면서 대학 사회도 위축되는 모습이다.
불안감이 커지자 주요 대학들은 유학생이나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비자와 관련된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설명회를 열고 있다.
대학들은 매일 같이 국제 학생들의 신원 변동 여부를 조회하고 있다고 한다. 변화가 생기면 즉각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학생들의 비자가 취소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대학들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결국 학생들 개인에게 주의를 당부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학생들이 정확히 뭘 조심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안 그래도 트럼프 정부는 대학 보조금 삭감 카드를 들고 압박하고 있어 대학들은 기계적 중립을 지키려 하는데, 국제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중압감에 당분간 시달리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