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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운전면허증과 교환한 '반쪽짜리' 미국 신분증

Real ID 시행 대란 속 운전면허증 교환하기

by Tatte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나무늘보 공무원이 등장한 씬을 기억할지. 세상 속 편한 얼굴을 하며 느릿느릿 업무를 처리하는 나무늘보의 천하태평한 모습은 스크린 관객들까지 숨 막히게 한다.


이 나무늘보는 미국 차량국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을 풍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캘리포니아 등 여러 주에서는 DMV로 불리지만 내가 사는 매사추세츠에서는 RMV(Registry of Motor Vehicles)로 부른다. 본질적으로 같은 기관이지만 주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고 한다.


미국의 행정 처리 속도는 내가 미국에 있었던 15년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한국의 그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미국에서 공공기관에 가지 않으려 애쓴다. 공무원들은 고압적인 태도를 비출 때가 많은 데다, 느린 업무 속도로 사람 속을 터지게 한다.


슬프게도 미국에서 차를 구매했다면, DMV나 RMV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자동차 보험을 가입할 때도 운전자 등록을 하려면 RMV에서 면허증을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발급받는 국제면허증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이 경우 보험비가 올라가는 페널티를 감수해야 한다.


외국인 신분으로 이미 자동차 보험료는 수백만원이 깨지는 상황이라, 추가적인 페널티를 물지 않기 위해 RMV에서 현지 신분증을 발급받기로 했다.


매사추세츠에서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현지에서 새로 시험을 보고 면허증을 따거나, 기존에 있던 한국 운전면허증을 영사관에 일시 반납하고 미국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하는 방법. 다행히 매사추세츠는 우리나라와 운전면허 상호교환이 되는 주였다.


새로 면허 시험을 보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한국에서 면허증을 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온 면허증을 미국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하는 편이 유리하다.


이 과정에서도 선택이 필요하다. 미국 운전면허증에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다.


하나는 일반(Standard) 운전면허증, 다른 하나는 신분증 역할도 겸하는 Real ID. 일반 면허증은 한국에서의 운전경력 이력과 몇 가지 서류로 미국 거주 여부를 증명하면 된다. 하지만 Real ID는 추가적인 신원 확인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에 발급 절차가 더 까다롭다.


Real ID의 가장 큰 장점은 공항에서 여권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신분증 역할을 해준다는 점이다. 나는 1년 정도 짧게 머물 예정이고, 여행을 가더라도 여권을 항상 들고 다니다 보니 Real ID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Standard 면허증을 받기로 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증 발급을 받으려면 경찰서에 가서 그날 즉시 발급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 RMV는 사전 예약을 권고한다. 예약이 쉬운 것도 아니다. 나의 경우 보스턴 도심 유일한 RMV인 헤이마켓(HAY MARKET)으로 가야 했는데 대학교 수강신청보다 예약이 어려웠다. 이 지점이 아니면 매사추세츠주 내에 있는 다른 RMV지점을 가야 했는데, 모두 대중교통이 없어 직접 운전을 해서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면허증이 없지만 운전을 해서 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자리가 열리지 않아 몇 날 며칠을 수시로 들어가 확인해야 했고 가까스로 RMV에서 지정한 기간 안에 헤이마켓 지점으로 예약을 마칠 수 있었다.


예약에 성공했지만 예약된 날짜는 무려 한 달 뒤였다. 누군가 취소한 자리가 겨우 나오는 거라 날짜나 시간을 선택할 여유는 없었다.


겨우 예약에 성공했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운전면허증 받으려 한 달을 기다린다는 게 말이나 되나. 뭐든 그 자리에서 뚝딱 발급해 주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많은 것들이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미국의 행정처리 속도도 15년 전보다 조금은 나아졌을 것이라는 기대는 와장창 깨졌다. 그럼에도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한 달을 기다렸다.


재방문은 없다는 의지 속에서 만발의 준비를 한 뒤 RMV를 찾았다. 필요한 서류를 잘 준비했는지 10번 정도 확인한 것 같다. 이번에 실패하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기에.

RMV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

예약한 시간은 오전 10시 40분. RMV에서는 예약 시간 15분 전에 맞춰 오라는 권고하고 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가도 소용없다.


2층에 위치한 RMV에 들어가 번호표를 뽑으려는 데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한 직원이 사전 예약자는 오른쪽에, 워크인 방문자는 왼편에 줄을 서라고 안내해 주었다. 사전 예약자 줄은 비교적 빨리 빠졌는데 나는 20분 정도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30~40분만 기다리면 업무를 끝낼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RMV에서 나와 같은 절차를 밟았던 몇몇 블로거들도 30~40분 만에 업무를 끝냈다고 했고, 몇 달 전 나보다 먼저 면허증을 바꿨던 배우자도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받은 번호와 이제 막 호명된 번호를 대조한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 내가 받은 번호는 L230번이었는데, L170번대의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 50명 이상의 대기자가 있다는 얘기다. 알파벳 L 외에도 M이나 K 등 다른 알파벳이 붙은 대기자도 있어 실제 대기인원은 80명 이상은 족히 돼 보였다.


워크인 방문자들이 서 있는 대기줄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오전 10시 40분 밖에 안 됐는데 이미 이날 받을 수 있는 워크인 방문자 한도를 초과해 RMV 직원들은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Real ID 행정 효력이 발생하는 5월 7일 전 급하게 신분증을 교체하려는 사람들이 RMV에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은 행정 효력이 발생하기 3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이 주에 신청을 완료해야 5월 7일 전 '집'으로 신분증이 담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다.


사실 Real ID 전환은 꽤 오래전부터 추진돼 왔다. 2005년 9.11 테러 이후 보안 강화를 목적으로 'REAL ID 법안'이 제정됐지만, 여러 주 정부의 반발과 팬데믹으로 시행이 여러 차례 연기됐다.


20여 년 가까이 펜딩됐던 Real ID는 오는 5월 7일부터 행정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Real ID가 주민등록증 역할을 하다 보니 발급받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크다. 국내선을 탑승할 때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이 Real ID가 필수 신분증이 되다 보니 여권이나 Real ID가 없으면 사실상 비행기를 탈 수 없다.


미국 전역 방방곡곡에서 그렇게 열심히 Real ID 광고 캠페인을 했는데,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와야 움직이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딜 가나 똑같은가 보다.


하필 이렇게 행정적으로 혼돈스러운 시기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게 되면서 나는 RMV의 명성(?)을 몸소 체감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쇼츠를 수백개 본 것 같은데 대기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난 상황. 이날 1시까지 가야 했던 수업은 RMV에서 발 묶인 덕분에 통으로 날리게 됐다.


수업도 놓치고 이날 하루도 공치고. 동태눈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스몰톡을 하던 옆사람의 번호가 불리자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사람들의 소리였다.


얼마 안있어 방송에서 내 번호를 불렀다. RMV에서 내 번호가 불린 시간은 번호표를 받은 후 무려 3시간 뒤. 213번을 230번으로 잘못들은 것은 아니겠지 수차례 확인한 후 호명된 카운터로 달려갔다.


나무늘보 같은 낙천적인 직원 대신 무뚝뚝한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하더니, 많은 인파에 지친 듯 들릴락 말락한 작은 목소리로 면허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어야 하니 지정된 자리에 서보라고 안내했다. 그 뒤에 있는 절차도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리듯 말해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야 했다. 알파벳 읽기나 도형의 색깔 말하기, 왼편이나 오른편에 보이는 불빛 색 말하기 등 시력 검사도 무난히 마쳤다.


내 서류 검토가 거의 끝나갈 때쯤, 한 직원이 다가와 나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 직원이 시선을 빼앗아간 덕분에 끝날 듯했던 서류 작업은 추가로 5분 정도 지연됐다. 그렇게 20여분 정도 창구에서 운전면허증 교환 업무를 마치고, 종이로 된 임시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실물 운전면허증은 5~10일 뒤 우편으로 날아온다. 이날 수거한 한국 운전면허증은 되찾지 못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안내는 듣지 못했다. 어련히 알아보고 왔겠지라고 생각했던 걸까.

발급 받은 임시 운전면허증


이날 면허증 교환을 위해 내가 들인 돈은 110달러. 약 17만원 가량의 비용이 발생했다. 사회보장번호 SSN이 있는 배우자는 Real ID를 발급받는데 70달러 정도 들었는데, 나는 SSN이 없어서 그런지 그보다 40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내가 받는 운전면허증은 Real ID도 아니어서 이 나라에서는 사실 반쪽짜리 신분증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여야 했다.


앞으로는 공공기관을 방문할 일이 없길 바라며. 다시 보지 말자, R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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