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oon이 세계를 정복하려면
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15년 만에 돌아온 미국은 많은 것이 그대로였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주목도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연해지기 어렵다.
내가 미국에 입국한 시점은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이 영화관에서 한창 상영 중이던 지난 3월이었다. 개봉 첫날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한국 감독 작품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서점뿐 아니라 대형마트 내에 있는 책 가판대에서도 영화의 원작 소설 '미키17'도 볼 수 있었다. 이 책의 띠지에는 <미키17>의 원작이라는 점을 알리려 봉준호 감독의 이름과 로버스패틴슨 배우의 얼굴이 크게 붙어 있었다. 미국 마트에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보게 되다니. 그 뒤로 마트에서 이 책을 지나칠 때마다 반가운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잘 보이는지 괜히 한 번 살피곤 했다.
비주류였던 K-POP이 이제 미국 주류 시장으로 흘러오는 현상에 대해 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전파 속도가 빨라 비교적 시장 진출이 용이한 음악과 영화는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더디지만 문학 분야도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를 필두로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 작가가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장의 눈이 한국 문학계로 쏠리고 있다.
K-문학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느꼈던 것은 미국의 한 공공 도서관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매사추세츠주 캠브릿지의 공공 도서관에는 한국 서적만 모아놓은 섹션이 도서관 한편에 마련돼 있다.
한국 작가가 쓴 영어로 된 문학이 아니라 한국어로 출판된 책들이 한데 모여있다. 책장에는 한국어로 또렷하게 '신간!한국어로 된 도서'라는 안내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한국어로 된 책뿐 아니라 한국계 작가들이 쓴 책들도 캠브릿지 퍼블릭 도서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연히 지하 1층에 있는 소설 분야 섹션에서는 'THE MERMAID FROM JEJU(제주에서 온 인어'라는 제목의 책이 추천 도서칸에 진열돼 있었다. Sumi Hahn이라는 한국계 작가가 쓴 작품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한국인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의 시기를 견딘 제주도 해녀라는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다룬 책이 미국의 한 공공 도서관의 추천 도서로 진열되어 있다는 점은 감회가 새로웠다.
일본과 미국이 주름잡고 있는 코믹북(만화책) 시장에서도 한국의 문학들이 성과를 내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단행본 발간이라는 전통적인 발행 방식을 고수하는 일본과 미국의 만화 시장에서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이끌어낸 한국형 만화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다니. 이제는 웹툰으로 시작한 만화가 책으로 발간돼 미국 동네 코믹북 샵에 진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웹소설, 웹툰에 이어 게임까지 성공한 IP인 '나 혼자만 레벨업'은 'Solo Leveling'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돼 있었다. 수십 년간 독자팬을 형성한 일본의 명작 만화 슬램덩크의 바로 아래 칸이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네이버 웹툰의 미국 버전인 라인 웹툰에도 인기가 많은 상위 10위 안에 '전지적 독자 시점(Omniscient Reader)'을 비롯한 한국 웹툰이 절반 이상 포함돼 있다.
심지어 얼마 전 하버드대학교 옆에 있는 한 로맨스 서적 전문 서점에서는 웹툰 '상수리나무 아래'의 번역본 'Under the Oak tree'를 발견했다. 이 서점의 만화 섹션은 대부분 일본 작가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던 유일한 한국 작품이다. 미국의 한 니치 마켓에서도 한국 지적재산권(IP)에 기반한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한국 웹툰이 보수적이었던 일본과 미국 코믹북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해외 불법 유통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뤄낸 결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의 웹툰 콘텐츠는 해외에서 불법으로 번역, 유통돼 저작권 침해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올 1월 한국저작권보호원에서 발간한 '2024년 해외 한류콘텐츠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해외 한류콘텐츠 불법유통 사이트에서 게시되어 있는 한류콘텐츠 불법복제물은 약 4억 1409만 건으로 집계되는데 이중 71.6%인 2억 9650만 건이 웹툰 콘텐츠인 것으로 파악됐다. 제공언어별로는 영어가 2억 2969만 건(77.5%)으로 가장 비중이 높았다.
앞서 언급한 '전지적 독자 시점', '나 혼자만 레벨업', '상수리나무 아래'와 같은 국내 작품은 모두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대표 플랫폼 업체들의 우산 아래에서 IP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있다.
'양성화' 된 국내 플랫폼 유통망을 기반이 있었기에, 또 불법 유통망 대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콘텐츠를 즐기는 훌륭한 독자들이 있었기에 웹툰 분야는 세계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음악과 영화가 정당한 저작권을 보호받았기에 전 세계 유통망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 만화에 대한 불법 유통망이 근절된다면 미국의 동네 코믹북 샵에 'K-Toon' 섹션이 세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