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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必然)_ 퇴사하는 후배에게

쎈 선배의 편지

by 쎈 바람

며칠 전 퇴사를 앞둔 회사 후배를 만났습니다. 저와 다른 조직이었지만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하고 싶었던 후배였기에 퇴사 결정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결정했겠지만 오래도록 몸담았던 회사라 미련이 남는 것도 당연하고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고민도 많겠지요. 표정이 굳어 있는 후배에게 십여 년 전 제가 퇴사를 고민할 때 경험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재직 중인 회사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는데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마침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잔류와 이직의 장단점이 명확하게 달라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생각이 쌓여만 갔습니다.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데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성되었기에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실타래를 풀어 보려고 애쓰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 두세 시간 만에 잠이 깨더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뒤척이다 아침이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점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점을 보자 마음먹고 예전에 후배 때문에 번호를 저장해 두었던 점보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걸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낯설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 제 머릿속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전화가 연결되고 오늘 찾아가도 되는지 묻는 저에게 할머니는 조용히 말하셨습니다.

"제가 감기에 걸렸어요. 오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어지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 통화는 꿈같았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다 정신을 차린 후, 머릿속을 비우고 싶어 서점에 가서 시장조사나 하자는 마음을 먹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오후에는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인터넷으로 예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 인터넷이 다운되거나 승인이 취소되면서 상영관 좌석이 사라졌고, 보려고 마음먹었던 영화를 예매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시간에 상영하는 다른 영화를 예매했더니 그것은 바로 예매되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서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찬찬히 책을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광화문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주말을 맞은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새로 나온 책도 보고 학부모를 만나 인터뷰도 하면서 한참을 서가에 있다가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서가를 벗어났는데, 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습니다.

"정목 스님 강연회가 있습니다. 듣고 가세요."

<비울수록 가득하네>라는 책을 출간한 스님이 서점에서 사인회를 하기 전에 강연부터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장을 들여다보니 청중이 거의 없어 나라도 한 자리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앉았는데 강연이 시작될 무렵에는 강연장이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맑고 편안한 인상의 정목 스님의 말씀을 듣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고였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강연장에 혼자 앉아 있다가 입구에 쌓여 있는 스님의 책을 들춰보았습니다.

몇 장을 들춰보다가 나는 이 책이 선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에게 우선 비우라는 메시지를 담고 찾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자에게 사인받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책에 스님의 사인을 받고 출판사 직원의 권유로 폴라로이드 사진까지 찍은 후 저도 모르게 스님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스님. 저는 평소에 저에게 필요한 책이 저를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이 책은 올해 저에게 찾아온 첫 번째 책입니다. 이 책이 저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말을 들은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두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이 나를 찾아온다는 말씀이 아주 좋네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스님과 저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날 스님의 따뜻한 손을 놓고 책을 가슴에 꼭 품은 채 돌아서서 걷는데, 문득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목 스님과의 만남을 위해 그날 하루가 준비되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점을 봐야겠다는 제 한심한 생각이 접혔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강연회 시간에 상영되는 영화가 예매되지 않았고, 갑자기 방문한 서점에서 계획에 없던 강연을 듣게 되었고, 평소 좋아하지 않던 장르인 에세이를 구매하고 저자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 하루는 결국 정목 스님의 말씀을 듣고 책을 만나기 위한 필연(必然)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니,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머릿속 엉킨 실타래가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순리대로 혹은 필연으로 풀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지난 시간 속의 선택을 돌이켜 보면서 제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 의지조차도 준비된 필연이라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퇴사하는 후배에게 우선 머리를 비우고 다가올 필연을 맞기 위해 준비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저와 후배와의 인연 또한 필연이었기에 이 연연의 끈이 앞으로도 이어질 걸 믿으며 마음을 다하여 후배의 앞날을 응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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