쎈 선배의 편지
우리는 모두 일하고 싶어 하고 가능하면 계속 일하려고 합니다. 일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이자, 물질적인 획득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이며,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이자 인생의 의미를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일은 자신을 위한 소중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행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결과물이 타인의 선택을 받아야만 합니다. 타인의 선택을 받는다는 건 곧 책임을 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교육 출판사에서 첫발을 내디디고 책을 몇 권 만들었을 때,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수능 외에 대학별 본고사가 시행되던 해였습니다. 본고사는 논서술형이라 학생들에게 부담이 큰 시험이었고, 많은 출판사가 본고사 대비 교재를 출간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 교재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회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부산에 사는 한 학부모였습니다. 그분은 회사에서 출간한 교재를 언급하며 개발 담당자와 통화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담당자에게 그분은 차분한 어조로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가 대입 시험장에서 수학 시험을 치기 직전, 가져간 교재로 공식을 쭉 훑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식 하나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달라서 혼란스러웠지만, 확인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 공식을 이용하는 문제가 출제되었고,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설마 책이 틀릴 리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책의 공식을 믿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책이 틀렸던 겁니다.
그 학부모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본고사는 한 문제로 당락이 갈리기도 하는데, 아이가 불합격하면 누가 책임지나요? 시험에서 떨어지면 다시 공부해야 하고, 그건 아이의 소중한 1년을 잃는 일인데요.”
담당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니, 불합격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이 상황을 책임질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우리 팀은 모두 얼어붙었습니다. 신입이었던 저는 더더욱 그랬고요. 그때 우리는 우리가 만든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학부모가 요구한 책임질 방법은 아무리 궁리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학의 합격자 발표를 긴장하며 기다렸고, 다행히 그분의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합격한 건지 아니면 우리가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아이가 합격했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은 저에게 강한 메시지를 남겼고, 저는 일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일에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제가 구성한 한 문제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건 교육 분야뿐 아니라 모든 일에 해당될 겁니다.
일을 하다 보면 ‘책임지겠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답을 못하거나 자리를 걸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을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는 타인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일은 ‘나를 위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위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일은 나를 넘어서 타인을 책임질 때,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