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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Feb 20. 2019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다

우리가 즐겨야 하는 이유

다방구, 진돌, 구슬치기, 오징어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단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킬 놀이 이름이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동네 놀이터에 모여 하나를 선택해서 놀았다. 놀이였지만 엄연히 승자는 존재했다. 이기기 위해 다툼이 일어날 만큼 치열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잘하기보다는 즐기려고 노력했다. 이기면 기분은 좋았다. 그렇다고 이기기 위해 매일 운동하며 체력을 기르거나, 밤을 새우며 전략을 만들지는 않았다. 재밌으면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2명은 항상 옷이 찢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즐거움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나이가 되었다. 즐거움 뒤에는 결과가 필요했다. 결과가 좋으면 즐거워해도 상관없었지만, 결과가 나쁘면 즐겁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가끔 결과에 따라 나의 즐거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를 마치고 수학 선생님과 국사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따로 불렀다. 두 선생님의 목적은 달랐다. 그때 수학시험은 전교 1등, 국사시험은 반 꼴등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수학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다음 시험에서도 꼭 좋은 성적 받도록 하자.”

“국사 성적이 엉망이구나. 재미없니? 다음 성적은 잘 받도록 하자.”    


나는 수학이 싫어서 나중에 문과를 선택했고, 잠시였지만 어릴 때 고고학자를 꿈꿨을 만큼 역사를 좋아했다. 수학 점수가 잘 나왔던 이유는 전날 벼락치기로 봤던 유형의 문제가 대부분 나왔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국사시험은 답을 밀려 써버렸다. 이때부터 시험 운은 지지리도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선생님으로부터 다른 의미의 특별 관심을 받았다. 다음 기말고사에서 수학은 반 평균, 국사는 상위 10%에 속하는 점수를 받고 나서야 관심이 멀어짐을 느꼈다.    


사람들은 잘하는 것에 대해 강박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 같다. 자라는 환경 차이에 의해 언제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분명, 시험 혹은 점수로 평가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잘’을 적용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잘’은 언제나 상대성을 띤다. 혼자인 삶에서는 필요 없는 단어이다. 어떤 결과가 ‘잘’을 증명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신경 쓸수록 ‘잘’에 대한 욕구는 커지지만, 기준은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희미해진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잘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좋아하고 즐겨야 잘할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방구, 진돌 하던 어릴 때 사용하기 좋은 말로써만 인식했다. 사회는 즐기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중하지만, 결국 우대받는 것은 잘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연에서는 등수로밖에 사람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1등은 즐기기보다는 잘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참가자는 노래하는 것을 정말 즐거워했다. 그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즐거웠고, 감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음악 전문가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패자부활전이 있었지만, 통과하지 못했다. 패자부활전이라는 기회도 잘해야 올라가는 것이지 즐긴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사회는 즐기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즐겨서 뭐해? 잘하지 않으면 단지 너의 즐거움일 뿐이야.
돈이 생기지도 않고, 너와 네 주변은 힘들어질 거야.
잘하려고 노력해야 해. 그래야 네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어.

 

그렇다고 잘하고 싶지만, 다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아직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가끔 잘하는 것이 없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자책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가치관이 뚜렷하지 않은 학생이 최악의 선택을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나처럼 모두가 잘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은 안 되고 시간만 낭비할지 모르지만, 즐겁다면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만족은 행복과 깊고 가까운 연관이 있는 단어이다.

즉, 잘하지 않더라도 즐겁다면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행복은 만족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여행하면서 각 국가의 19살인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대학 입학 전에 친구들과 특별한 추억을 남기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대학을 포기한 친구들도 있었다. 10명 중 3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좋아하는 것을 대학에서 할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는 친구들이었다.


시에라리온에서 만난 독일 친구인 캐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좋아했다. 머무는 곳의 가족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실력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지 4년이 넘었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미술학원에서 몇 달 다니면 되는 실력 같았다. 그녀에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림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 두 달 다녔던 것이 다였던 내가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 그릴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캐런, 왜 그림 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거야? 너는 수학을 잘한다고 했잖아. 대학에 가서 수학 공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맞아. 수학을 잘해. 그런데 수학보다 그림이 훨씬 재밌어.”

“그림이 좋으면 미술 쪽으로 공부해보는 것은 어때?”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잖아. 나는 내가 그림 못 그리는 것을 알고 있어. 본격적으로 공부한다고 해도 잘할 자신도 없어. 그냥 지금이 좋아. 그림 그릴 때 가장 행복해.”    


그녀의 말대로 사람은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하루는 24시간에 불과하다. 보통 한 분야에서 ‘잘’을 쓸 수 있는 전문가를 이야기할 때 ‘1만 시간의 법칙’을 이야기한다. 1만 시간의 노력이면 무언가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만 시간은 매일 10시간씩 3년 혹은 매일 1시간씩 30년을 노력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인해 포기할 수도 있고, 재능이 있어 1,000시간 만에 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 시간을 달성한다고 해도 잘한다는 절대성을 둘 수는 없다. 앞서 말했던 ‘잘’의 상대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릉선수촌에 있는 선수 중 만 시간 이상 운동을 안 한 사람은 없지만, 그들 중에서도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평가는 메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잘하는 것보다 즐기기가 더 쉽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말은 아니다. 잘하면 결과에 만족할 수 있지만, ‘잘’은 남과의 상대성 때문에 만족에 끝이 없다. 반대로 즐거운 것은 ‘남’이 아닌 ‘나’의 기준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만족도를 책정하게 된다.

만족도는 행복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다시 이야기한다.     


기니에서 아프리카 전통 악기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세쿠로부터 일주일 동안 총 10시간 강습을 들었다. 전통 악기의 맛만 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일정상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서야 아쉬움이 가득 밀려왔다.


다음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공연하는 마을 축제에 초대받았다. 당일에 내가 할 일은 아이들과 놀면서 사진 찍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연주를 권했다. 공연을 망칠 수 없으므로 손사래 쳤지만,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지속된 권유에 연주를 시작했다. 당연히 전문가인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축제는 더욱 흥겨워졌다. 내 실력보다 내가 자기네 축제에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제야 연주와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들과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수익금을 정산할 때 나에게도 n분의 1이 지급되었다. 나도 엄연한 팀의 일부였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그들의 말에 받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내가 받은 3만 기니프랑(약 4,500원)은 현지인 하루 수당과 비슷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큰 금액이었다.


10시간이 아닌 100시간, 1,000시간을 연습했다면 좀 더 잘했겠지만, 부담이 커져서 즐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즐겼기에 내가 만족할 수 있었고, 결과도 좋았다. 묻지는 않았지만 세쿠도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알고 있어서 나에게 제안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섣불리 도박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5시간 동안 4,500원 벌었으니, 시급이 900원이다


분명, 한국이라는 사회는 잘하는 것을 선호하며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나도 한국에 돌아와 생존하기 위해 글쓰기를 포함해 내 미래에 도움될 만한 것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예전 수입보다 몇 분의 1이 줄었는지 모를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건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 안에는 즐기면 잘할 수 있다는 개념을 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턱대고 즐기기만 하는 시기는 지나버린 것 같다.


그래서 아쉽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겼어야 했음을.






책 <답은 '나'였다>와는 달리 사진 몇 장을 첨가하였습니다.

(기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위클리 매거진 목차가 총 12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맥락을 이해해야 하다 보니 사진 몇 장을 넣는 것이 좀 더 공감하기 쉽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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