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머릿속엔 몇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습니까?
그날도 다른 때처럼,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면서, 회의장 뒤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몇 분 후, 평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지루해져서 그만 자리를 뜨려고 이것저것 소지품을 정리하고 코트를 걸치려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 머리는 마치 한 면에 TV들을 여러 개 전시해놓고 각각 다른 채널을 틀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리모콘이 없는 거죠."
아니, 바로 그거야.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던 여학생은 내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무슨 소리야?" 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말한 사람은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있어서 자기도 그걸 어떻게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하나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이 순간, 나의 우주는 새 장을 맞이했다. 나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뭘 선명하게 자각하는 경우가 드물고, 단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바로 그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 천지가 개벽되고 천사들이 합창하는 느낌이었다.
Robert Jergen 저. <리틀 몬스터>
ADHD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리얼하고, 가장 생동감 넘치며, 매우 심각하지만 매우 희망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리틀 몬스터>
The Little Monster . Growing Up with ADHD.
이 책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위의 장면이었다.
"내 머리는 마치 한 면에 TV들을 여러 개 전시해놓고 각각 다른 채널을 틀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리모콘이 없는 거죠."
아니. 세상 사람들 다 그런거 아냐? 라고 생각한 저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반응에 머리를 망치로 두드려 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나 역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름 충격을 받았다. 굳이 나에게 <여러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는 머릿속> 과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 를 택하라 하면 나는 당연히 전자이다. 정도는 약하지만 나도 머리속에 늘 여러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다. 일을 할 때에도 한번에 하나에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의 경우에는 다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집중을 했던 때가 바로 임용고시 준비를 했던 10개월이었으며, 국어수업 준비를 할 때에나, 수업을 진행할 때에도 초초초집중의 면모를 보인다. 집중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짧고 굵게 무엇이든 하는 편이다. 하지만, 흥미가 없거나 특히 취약한 행정적인 업무를 할 때에는 집중도도 떨어질 뿐더러 '대충'신공이 발휘된다. 물론 '일부러'는 아니다.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나중에 되짚어 보면 되짚을 수 없을 정도로 기억 자체가 안 난다.
오래 전, <리틀 몬스터>책을 읽으며 나도 저자와 비슷한 질문을 남편에게 했다. 그리고 오늘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 (나) 아니. 머릿속에 채널이 한 개만 틀어져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보통 다 서너개씩 틀어놓고 사는거 아니야? 난 열개 채널도 가능하다고!(자랑스럽게)
- (나)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지?
극단적으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남편은 말한다.
- (그)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거의 한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어. 다른 채널들이 여러 개 틀어진다 하더라도 순간순간이지.
- (나) 말도 안돼. 당신만 그런거 아냐?
반발해 본다.
- (나) 더군다나 요즘은 다 멀티 시대라고! 애들을 봐! 스마트폰 들어놓고 숙제하고 공부하고 다 한다니까!
- (그)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스마트폰 시대의 이야기지. 그 전의 당신을 잘 생각해 봐. 어땠는지.
믿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어떻게 머릿속에 한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을 수가 있을까.
지금도 일일이 주변 사람들을 다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의 머릿속엔 몇 개의 채널이 틀어져 있습니까?
라고.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인상적인 표현이 있다. ADHD를 다룬 어느 다큐멘터리에 나온 이야기라는데,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다. 평생을 ADHD인줄 모르고 살아온 성인이 비로소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한 후의 반응이다.
- 마치 머리 속에 흰 눈이 내린 것 같아요.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대충 이런 말이란다.
머리 속에 흰 눈이 내린 것 같은 상태.
나도 그 기분은 안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바로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때. 나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니까.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하지만 가장 내 머리속이 차분해지는 시간은 바로 잠들기 직전이다. 산만하게 돌아다니던 수없이 많은 생각과 영감들이 마치 반짝이가 가득 든 모래시계를 뒤집어 엎었을 때처럼 차르르 가라앉으면서 조용해진다. 고요하고 깊은 생각과 사색과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시간이 내게는 매우.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잠을 많이 자는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잠자기 직전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내면의 시간을 내가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평상시에도 머리속에 켜 있는 채널을 줄일 수 있다면.
여러 개로 흩어져서 어느 하나 제대로 끝맺을 수 없는 일들을 하나로 모아서 차분하게 하나씩 해결할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채널 말고 내가 해야만 하는 채널에도 조금 더 디테일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음.
ADHD약을 먹을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또 한 알의 약을 먹었다.
이쯤해서 이젠 이 약을 먹은 효과에 대해서 기록을 해봐야겠다.
리탈린. 에 대해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