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쓰기 수업 5주차 과제
5주차의 글쓰기 과제는 '공포' 혹은 '불안'이었다.
매주마다 많은 고민 끝에 어떤 글감으로 함께 글을 쓸지를 과제로 제시한다. 4주차의 글쓰기는 '디테일 살리기' '장면묘사'였다. 그 감각을 가지고 5주차의 '공포'를 묘사한다면 더 실감나는 글이 나올 것 같았다. 또한 '공포''불안'이란 결국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중의 하나이기에 한번쯤 우리가 깊이있게 다루어보아야 할 소재이기도 했다. 내가 미리 제시한 '공포'에 대한 예시글은 다만 예시일 뿐 수강생들 모두가 각자의 '공포'와 '불안'에 대해 탐구하고 꺼내볼 수 있기를 바랐다.
<공포를 자세히 묘사하기 / 분위기와 문체로 공포를 표현하기 / 공포와 불안의 근원에 대한 탐구>의 글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고, 이들은 각자의 안에 있던 것들을 성공적으로(?) 끄집어냈다.
햇볕이 붉은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4시가 지나고 구름 낀 오후는 음울한 황혼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빗방울이 계단 쪽 창문을 계속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은 복도 뒤편 숲속에서 울어대고 있었다. 내 몸은 조금씩 돌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그러던 용기도 사그라들었다. 나의 습관적으로 느끼는 굴욕감, 자신감의 상실, 버림받은 침울함이 사그라지는 분노의 깜부기불 위로 촉촉이 떨어졌다. - '제인에어'중에서
앤줌마님 - 우물에 빠진 날
꽃마흔 님 - 없는 개
뮤즈님 - 세상의 무서운 공기는 죄다 그곳에 있었다
블루베티 님 - 그 많던 어둠은 다 누가 먹었을까
참꽃마리 님 - 내 눈에 들보
동윤 님 - 꿈이 나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앤줌마님은 어린 시절의 공포를 꺼냈다. '우물에 빠진 날'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어두움의 순간을 꺼내어 글로 표현했다.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그 날의 사건은 두고두고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해 일종의 폐쇄공포증을 계속해서 겪어오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물에 빠졌을 때 '튀어나온 돌멩이 하나'를 잡고 있던 시간을 더 잘 묘사해보라 말했고, 그녀는 다시 생각하기가 너무 두렵다 했다. 자세한 묘사를 뒤로 하고 대신 '고드름같이 튀어나온 돌멩이'라고 바꾸었는데, 그 하나만으로도 읽는 이의 상상이 구체화되었다. (오래된 공포를 끄집어내서 자세히 표현하는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작업을 통해 우물에 빠진 날의 기억이 지금부터 또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지만, 어두운 우물속의 어린 '앤줌마'님이 앞으로의 기억 속에서는 조금 더 빨리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은 치유를 동반하니까.
꽃마흔 님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개', 세상을 뜬 지 1년 된 개 '둥이'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별'은 영원한 문학의 소재이자 공포의 근원이다. 그것을 쓰는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공포이며 불안이다. 꽃마흔 님 역시 이별 후 1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이 글을 꺼낼 수가 있었다. '없는 개는 없는 개지만 영원히 내 발밑에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그녀는 마무리를 한다. 가장 어려운 죽음과 이별의 공포, 불안도 결국은 '영원한 만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뮤즈님은 또다른 '공포'를 말했다. 중국 대련의 뤼순감옥.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어 있던 곳을 방문한 체험기를 꺼냈다. 3년 전 방문했던 기억을 되살려 3.1절의 전날 글을 올렸다. 생각하기 어려운, 바라보기도 어려운 공포이지만 반드시 바라보고 기억해야 할 공포도 있는 법이다. 민족의 과거와 그날들을 지킨 이들에 대한 마음이 또한 그러하다. 나도 전쟁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포를 마주하려 노력하는 작업을 많이 한다. 읽기 어렵지만 관련된 책을 읽고 고통스럽지만 공포를 간접경험함으로써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또다른 의미의 '공감'작업이며 '공감'의 글쓰기이다.
블루베티님은 '그 많던 어둠은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우리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공포의 이야기를 썼다. 전설의 고향과 시골의 어둠.은 그녀가 말하듯이 '날것 그대로의 공포'이다. 더구나 그녀처럼 도시에서의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시골의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되어 어린시절의 기억은 '생생한 공포'로 남아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묘사'가 키워드가 될 텐데, 장닭과 마주치던 순간의 아찔함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장닭이 여유롭게 안방을 돌아다니다가 고개를 휙~ 꺾어 내쪽을 보았다> 이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좌류공포증이 생겼다니. 공포증 생성의 발원점으로 너무나 이해가 가는 순간이 아닌가!?
참꽃마리님은 '통증'과 '고통'에 대한 '공포'를 다루었다. 그렇지. 인간의 공포 중에 이보다 더 무서운 공포가 있던가. 몸에 대한 고통과 병에 대한 글도 우리가 쓰지 않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의 글이다. 다른이의 아픔이든, 내 아픔이든. 이 경우에는 아픔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생생하냐에 따라 독자의 시선이 함께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픈 경험을 무조건 생생하게 토해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
동윤님은 자신에게 가장 무서운 순간을 꿈꾸었다. 삶의 근간이자 뿌리이며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가 사라지는 꿈. 아니,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꿈.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공포는 현실보다 '상상'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빨강머리 앤 마지막권 '앤의 딸 리라'에 보면 앤의 둘째 아들 '월터'가 전쟁에 나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시를 쓰고 상상을 많이 하는 청년으로서 늘 '전쟁''죽음''고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으나, 막상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용감했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전해졌다. 편지에서 그는 말했다. 자신이 두려워한 건 '상상'이었지 막상 참혹한 현실은 슬펐을 뿐 두렵진 않았다고. 우리에게 '꿈'은 가장 두려운 공포의 또다른 순간일 수 있다.
어린 날의 우물에 갇힌 트라우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의 공포, 인간성의 말살과 이를 이겨낸 자의 참혹한 과거를 바라보는 공포, 생생한 날것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세계의 공포, 통증과 고통에 대한 공포, 꿈과 상상 속에서의 공포. 다양한 공포를 통해 글쓰기의 '공포'를 우리는 또 한번 건너뛰었다.
많고도 많은 세상 모든 공포와 불안 중에 굳이 또 하나를 추가해도 된다면 '백지'의 공포는 어떨까. 하얀 종이 (또는 컴퓨터 화면)위에 써나가야 할 때의 공포. 불안. 쓰지 않아 견딜 수 없어서 이 앞에 앉았는데 막상 쓰려면 떠오르는 수없이 많은 불안들.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쓰는 게 맞는걸까?
과연 이 글을 누가 읽어줄까?
과연 내 글이 글다운가?
이 수많은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려면.
그래. 별수가 없다. 그저 오늘도 쓰는 수밖에.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 - 윌리엄 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