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 세번째 글
한국에 있는 친정집에는 내가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이 ‘고이’ 간직되어 있다. 물건 버리기 좋아하는 아빠의 손에 언제고 버려질지 몰라 두려워하며 ‘절대로 버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언젠가 꼭 내 집으로 가져올 것이다’ 라고. 친구들과 나눈 편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커다란 박스 하나로 가득한 그 이야기들은 절대 버려져선 안되는 나의 자산이다. 나의 에세이 재료이고 내 감성의 저장고이다.
얼마 전, 8년만에 한국에 나간 어느날 밤.
나는 오래 전 나의 일기장을 꺼내 여전히 키득거리며 읽고 있었다. 일기 쓰는 것이 의무였던 초등학교 시절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일기장이다. 3학년부터는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나누어준 ‘일기장’이라는 형식의 노트도 있어서 차곡차곡 쌓여진 같은 노트는 꽤나 높은 탑을 쌓는다. 글씨는 악필이지만 제법 보는 재미가 있다. ‘안녕 나의 한옥집’을 읽은 독자라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어린시절 상상력이 풍부하고, 오도방정에, 질투와 허영심이 많은 아이였다. 말 그대로 언제나 '질투는 나의 힘'이었다. 거기에 글을 잘 쓰는 아이라면, 알만 하지 않은가? 그 아이의 일기는 어이가 없긴 하지만 꽤 재미가 있다. 피식피식 실소가 나온다. (여기에 공개하고 싶은데 한국에 있다!)
<오늘은 무슨무슨 일을 했다 ~ 내일은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정도의 요약으로 끝나는 일반적인 일기장에 비한다면 이건 요절복통 말괄량이 일기인 것이다. 거기다가 아이의 상상과 질투가 여과없이 드러나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 일쑤다. 읽다 보면 40년 가까이 지났는데 오늘 겪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는 일기는 4~5학년 때의 이야기들이다. 2학년 때 운명적으로 나의 글짓기 선생님을 만난 이후 글쓰는 법도 제법 틀을 갖춰가기도 했을 뿐더러, 이제 점점 10대에 가까워져가며 이야깃거리도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참~~~~ 정말이지 그시절의 ‘나’답게, 여과가 없다. 상상을 하고, 허영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친구와 싸운 후의 미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곳에 담겨있는 나의 이야기는 온전히 ‘나’의 이야기였고, 참 좋은 일종의 ‘자기치유’였구나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이야기들에 관심을 깊이 기울여준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정없고 영혼없는 ‘참 잘했어요’ 도장 정도만이 보인다. 나의 글짓기 선생님이 4학년 담임이 되었던 한 해에만 선생님과의 꽁냥꽁냥 대화가 간혹 나타난다. 나의 악필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글씨만 좀 더 잘 쓰면 참 좋겠는데’ 라고 해 주시고 ‘수진이 일기는 너무 재밌어’ 라고 멘트를 써주시기도 했다. ‘일기’라는 건 누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배웠기에.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나만을 위한 글을 쓰곤 했지만(과연??) 그래도 선생님의 한두마디 관심은 좋은 자극제가 되곤 했다.
그런데 뭔가가 시작됐다. 일기가. 재미가 없어졌다. 완전.
6학년 일기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뭔가 큰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엄청난 ‘변화’가 5학년과 6학년 일기장 사이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갑자기. 나의 일기가 재미없어졌다. 그것도 ‘매우’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야기에는 알맹이가 빠졌고, 상상과 유머는 사라졌으며, 내 일기의 생명이던 ‘질투’와 ‘허영’도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대신 평범한 일상과 반성, 더 나은 내일을 다짐하는 맥 빠진 모범생의 일상이 종이를 채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6학년 초의 일기장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을 듯 하다. 6학년 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무척 완고하고도 편견에 사로잡힌(것처럼 지금 기억되는) 여자분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 대한 편애도 심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행동, 정돈되지 않은 나의 모습은 무척 꼴사납게 보였던 것 같다. (난 선생님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의 학생은 아니었다. 분명) 실제로도 많이 구박을 받았다고 기억된다. 그런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에서 그녀는 날카로운 빨간펜의 독설을 남기곤 했다.
- 너는 늘 착한 마음이 아쉽구나
라든가
-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썼으면 반성을 해야지.
라든가 하는.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 아, 나의 일기가 보통 아이들의 일기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나는 독특한 아이이긴 했지만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선생님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후, 일기장의 컨셉을 바로 바꾸었다. 잔뜩 써내려가던 그날그날의 '진짜 사건'과 나의 수많은 감정 대신 일기장의 공식과도 같은 착한아이 코스프레가 쓰여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기의 아랫줄에는 ‘도와줘서 고맙구나’ 라든가 ‘좋은 걸 배웠겠구나’ 와 같은 선생님의 멘트들이 보였다.
물론 일기는 에세이가 아니다. 왜 ‘일기’가 에세이가 아닌지에 대해서 나는 수업 때마다 누누히 강조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가 중고등학교 시절의 일기처럼 감성의 흐름을 좇는 십대의 고백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또 ‘선생님’이라는 독자가 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그 시절의 일기는 진짜 ‘에세이’의 시작일 것이다. 에세이를 향한 초석이랄까. 그런 면에서 ‘좋은 에세이’는 과연 단 한명 독자의 취향을 지나치게 고려한 6학년의 일기일지 과감하고 솔직한 그 이전의 일기일지 생각해 볼 만 하다.
<읽는 재미, 솔직함, 진짜 ‘나’ 자신에게서 글감 찾기. 사소한 진실들.>
등의 관점으로 볼 때 단연코 6학년 이전의 일기야말로 좋은 에세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 매일매일의 삶에 담긴 나만의 이야기. 그것이 비록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교훈이 담기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진실될 수 있는 에세이가 아닐까.
내가 이 글을 통해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강할 때, 그것이 교훈적이거나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때, 내 진짜 이야기를 드러낼 수 없을 때, 좋은 에세이는 사라지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사소한 진실’이 사라진 에세이는 더이상 에세이의 생명을 지니지 못한 것이다. 나의 어릴 적 일기를 읽으며 나는 ‘내 최초의 에세이들’의 독자가 되었다. 그 글들의 작가였던 시기를 무려 30여년 지나 다시 독자가 되어 읽는 이야기들에서 지금은 잃어버린 작가의 자질을 읽는다. 과감함. 솔직함. 의도되지 않은 유머. 내 안의 진짜 이야기.
지금은 ‘과거’를 기억하며 글을 쓰지만 그때는 매일매일이 살아넘치는 생동감있는 글감이었다. 일곱 살의 나, 여덟 살의 나, 열 살의 나는 참으로 멋진 작가였다! 아. 나는 나의 이러한 작가적 자질, 일부러 돈을 주고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그 생동감을 꺾어버렸던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을 찾아가 시위라도 하고 싶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글을 쓰던 그 때의 '나'를 돌려달라고! 당신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재밌었을 6학년의 일기를 돌려달라고! 나의 허영심, 나의 질투심, 나의 과감함과 솔직함을 돌려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 마흔 다섯이 되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그 자질들을 그녀가 다 꺾어버렸다며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내가 대단한 작품을 쓸 수 없는 건 그녀 탓이라며 우겨보고 싶다.
<돌려달라! 돌려달라!> 나의 진짜 일기를! 내 최초의 진짜 에세이를! 이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뒤로 하고, 좌우지간에 다시 한번 나는 느낀다. 글 속에서 <사소한 진실>의 중요성을. 아름다움을. 힘을.
그리고.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독자가 어떤 글을 원하는가를.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