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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공메자 Nov 08. 2024

75 당신은 그리움이란 존재를 아는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를 과거로 묶어두는 게 아니라, 오늘과 미래를 아름답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 엘리자베스 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내일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된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이라는 '시'다. 


이 시의 교훈은 인생의 복잡한 감정들과 모순된 욕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다. 종종 금지된 것, 어려운 것, 또는 피해야 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큰 매력을 지닐 수 있다.  이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정한 욕망과 그리움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은 삶 그 자체이다. 그리움을 안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움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주 느끼는 감정 중 하나이다. 때로는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다면 이 그리움이란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 그리움은 단순한 감정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추억에 대한 갈망이다. 또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다. 그리움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이나 장소에서 생겨난다. 혹은 지나가버린 순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그리움의 대상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그 본질은 모두에게 비슷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감정이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핵심> 그리움은 본질적으로 결핍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대개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너무나 소중해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혹은 특정한 장소에서 느꼈던 평화로움이 떠오를 때, 우리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그리움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그리움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현재와 미래를 향한 우리의 소망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또한, 특정한 장소를 그리워할 때,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그 평화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그리움은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리움이 항상 긍정적인 감정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리움은 우리를 슬픔과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특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나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더 큰 아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럴 때, 그리움은 더 이상 추억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아닌, 마음속 깊은 상처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또한 그리움의 일부이다. 그리움이 없다면, 우리는 그만큼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움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과의 관계나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반추하게 된다. 그리움은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준 중요한 요소이다. 또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따라서 그리움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단순히 슬픔이나 고통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그리움은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은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움은 과거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느꼈던 사랑과 우정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지난 2024년 4월 블로그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라는 글을 쓰며 그리움에 참지 못하고 많이 울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고  여동생이 4학년일 때 사고로 죽었다. 우리 집은 3남 1녀로 여동생은 엄마의 우군이었다. 늘 엄마를 도와주는 착한 여동생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골집이었다. 한 날 오촌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시내로 연탄을 사러 가는데 두 살 위인 형과 두 살 밑인 여동생이 따라나섰다. 집 앞에는 개울이 있고 통나무로 다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연탄을 실은 리어카가 다리를 건너 오다가 뒤에서 리어카를 밀던 여동생 쪽에 있던 통나무 다리가 부러졌다. 여동생은 리어카에 가득 실었던 연탄을 전부 뒤집어쓰면서 개울로 떨어졌다. 연탄을 다 치워내고 엄마가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당시는 119도, 전화도 없었다. 여동생은 엄마 품에 안겨 "엄마 나 아파"라고 한마디만 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나는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울면서 벌벌 떨기만 하였다. 지금 살아 있으면 58세,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상상도 해 본다.  이젠 그만 슬퍼하려고 하는데, 슬픈 음악을 들을 때면 감정이 북받쳐 온다.  이처럼 그리움이라는 존재를, 나태주 시인이 '삶 그 자체'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글의 요약: 여동생의 빈자리>      

       

그날의 다리,        

통나무는 기억하고 있을까.     

리어카 가득한 연탄 위로,     

작은 손이 스쳤던 그 순간을.     

        

엄마의 품속에서        

"나 아파"라는 마지막 속삭임,     

그 말이 바람에 실려     

하늘에 닿을 때까지     

나는 울기만 했네.     

     

세월이 흘러,     

그 손길을 더듬어 보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내 마음 속 개울을 건너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남아 있네.    

      

어디선가 웃고 있을까,     

58세의 그 얼굴을 그려보며     

한숨처럼 떠오르는 미소.     

이젠 그리움을 놓아주려 하지만,     

슬픈 노래가 흐르면     

다시금 그날의 다리가 부서지네. 

            

삶은 그리움이라 했던가,     

아마도 그리움이,     

내 삶의 다리를 놓아     

네게로 이어주는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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