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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초병(3)

'인생은 꽈배기 가끔은 꿀꽈배기'

by 장정법

《이봐! 슈퍼맨은 진짜가 아니야》

부모님이 계신 수원에 우연히 들렸다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고등학교 시절 썼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오래된 영어사전을 찾게되었다. 책장을 몇 장 넘기는 순간 그 시절 내가 한국사에 관심이 많았던지 역사학과에 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문구와 함께 배트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그려놓은 어설픈듯해 보이는 배트맨 그림은 영화 속 실물과 달리 머리는 너무 크고 몸은 외소한 우수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몰래 웃음이 터져버렸다. 다음장을 넘기자 배트맨이 팽귄처럼 생긴 악당과 싸우고 있었다. 이 둘의 싸움엔 결론이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한 장을 더 넘겨보니 다행이 배트맨은 박쥐의 표식을 하늘에 비추며 승리의 브이를 내게 보여주었으니 악당팽귄을 물리친 것이 확실했다.

배트맨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우상이었다.

물론 요즘처럼 히어로 시리즈가 봇물 터지게 흔치 않았던 터라 영화관에 상영하는 왠만한 헐리웃 SF영화는 티켓을 사 긴 줄을 서 대기해야만 겨우 볼수있었다.

슈퍼맨을 좋아하는 친구와 배트맨을 좋아하는 친구 사이에 늘 단 한 명의 히어로를 고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면 늘 망설이며 고민했다. 둘 다 좋아하는데 누구 한 명만 골라야 하는 사실에 갈등한다는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고 대답해야하는 상황같이 어려운 딜레마였다.

슈퍼맨과 배트맨, 모두 좋아했다. 그래도 마음 속엔 현실과 가장 근접한 배트맨을 흠모했다.

이 둘은 평소에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다 위기가 닥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연약한 인간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정의로운 명장면에 두 주먹을 블끈 쥐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을까? 어른이 되고 엄청나게 많은 헐리웃 히어로물이 쏟아져 나오더니 결국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는 엄청난 시나리오가 탄생하는 것 아닌가.

어른이 된 후 나의 두 영웅이 결국 1대1로 싸우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씁쓸히 바라보았다.

예측했던바 슈퍼맨은 엄청난 괴력으로 배트맨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배트맨을 더 좋아했다는 비밀을 알아차려버린 듯 그는 피도 눈물도 나지 않을 냉혹한 눈빛으로 배트맨을 무너진 건물잔해 속으로 집어 던지기 일수였다.

슈퍼맨은 거대한 초인적인 힘으로 테크놀러지 기술로 포장된 배트맨의 모든 것을 벌거숭이 임금처럼 벗겨 버렸다. 우상과 같던 배트맨이 땅 속 깊이 곤두박이 칠 때 그동안 내가 배트맨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정정당당히 가면을 벗고 싸우자!’라고 외쳤지만 슈퍼맨은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고 배트맨은 슈퍼맨과 같은 초능력이 없었다. 야생의 늑대와 집에서 기른 강아지와의 정면승부였다. 하지만 배트맨은 그보다 더 지혜롭고 더 용감하게 슈퍼맨과 싸웠다. 물론 지혜와 용기만으로 슈퍼맨을 이길 힘이 없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그때였을까 배트맨 복장을 입지 않은 브루스웨인이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이봐! 슈퍼맨은 진짜가 아니야, 캔사스 농부가 만든 허상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검은 박쥐자켓을 몸에 걸치는 것 아닌가.

강함을 이기는 방법을 배트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강한 것은 결국 부러지고 강함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며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허상 앞에서 떨어왔다.

오랜 옛날 변방의 민족이었던 여진족은 자신들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제국에 멸망되고 오랜세월 작은 부락의 별볼일없는 오랑캐로 살아간다. 그런 100만명의 여진족이 바라 본 상대는 1억대국의 명나라였다. 여진족은 선조들이 남긴 역사서 금사(金史)에서 금나라(여진족)와 송나라(한족)가 전투를 벌여 여진인 17명이 한족인 송나라 군사 2천명을 사살했다는 기록과 함께

“여진인 1만 명이 모이면 천하가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며 당시 송사(宋史)는 말한다. 이처럼 거대한 명나라를 무릎꿇게 만든 오랑캐 여진족은 결코 강력한 군사력이나 군비가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이 가진 전투적 본능 중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단 한가지 강점을 찾아 내 싸워 이긴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 거대한 제국(송나라,명나라)이 가진 약점은 결국 강해보였던 허상이었던 셈이다. 결국 여진족은 훗날 만주족으로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역사상 가장 영토가 광활하며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하며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제국으로 거듭났지만 자신들의 지난 이민족사와 말타는 법을 잊어버린 약점을 틈타 외세의 침략과 내전으로 고전하며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오랑캐 여진족이 사라지기 이전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통해 제국의 주인이 되었는지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바닷속 작은 물고기 무리가 무리지어 다니며 천적을 만났을 때 하는 행동이 자신들이 천적 물고기보다 더 커보이게 만들어 천적이 도망가게 만든다. 하지만 천적 중 영리한 물고기는 자신보다 큰 작은 물고기 무리가 만든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그대로 정면 돌파하여 중심을 흩트러 놓아 작은 물고기들이 사방으로 분산되게 만든다. 천적에게 보여진 허상이 깨진 작은 물고기 무리는 드디어 살기위한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시련들도 격어보면 대게 그랬다.

닥쳐올 시련이 너무 커서 도저히 어찌할바 몰랐던 때가 누구나 있었고 거대한 시련 앞에 굴복하거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경험이다. 하나의 시련은 모두 여러 근심과 걱정이 만든 거대한 허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에 착시현상을 일으켜 마치 싸우면 질 것 같은 촉을 느꼈다. 초이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에게 도전한 배트맨처럼, 변방의 오랑캐 족속이 거대한 제국 앞에 도전장을 던진 역사의 명장면처럼 용기있게 정면돌파를 결심하여 맞선다면 우리 앞의 시련은 결국 작은 물고기가 만든 커다란 허상의 착시현상을 깨부숴 버리게 될 것이다.

추측건데 배트맨도 자신이 그동안 보여 준 검은 박쥐옷을 벗어던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왜냐면 누구나 그가 평범한 브루스 웨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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