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다시 돌아온 지 별로 안된 것 같은데 엊저녁에 이미 꽃이 피었다. 그동안 새로 시작한 일에 적응하느라 글 쓸 염두도 안 났는데,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다치고 나서야 드디어 시간이 났다.
이탈리아 친구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홈스테이 가족과도 종종 안부인사를 묻고는 하는데, 오히려 문자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번역기의 도움으로 서로 대화하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
블로그를 다시 익명으로 돌렸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좀 더 솔직하고 담백하게 쓰고 싶어서였다. 미사여구가 점점 많아지는 글을 보고 있자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느낌이다. 원래 성격 상 다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것 또한 글솜씨를 키우는 과정이라 생각하려 한다.
이탈리아 세 달을 살아보고 나니 이제 일 년을 살아보고 싶어졌다. 어학연수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워홀을 생각하고 있는데 한 번 도 해본 적 없는 비자를 준비하자니 여간 까다롭다.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얻어보려 한국 유학원 연락을 여기저기 해봤는데, 다들 로마나 밀라노는 추천해도 나폴리를 언급하는 순간 침묵이 먼저 흐른다. 나폴리는 피자와 마피아가 끝이 아닌데... 그 도시만의 아름다움과 한국 사람들 같이 정이 넘치는 사람들인데 그걸 몰라주니까 듣는 내가 다 서럽다. 물론!! 한국처럼 치안이 안전하니 그냥 와도 잘 살 수 있다는 얘기는 절때 아니다!! 그렇다고 와서 살아보지도 않고 평생을 오해 속에 살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도시이다.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북부만큼 남부도 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처음 로마에 도착해서 조금 구경하다가 바로 나폴리에 내려가 홈스테이 가족을 만나서 현실은 조금 뒤로 미루고 일단 휴식을 충분히 취했다. 불면증이 극에 달했을 쯤에 여행 온 거라 새벽부터 저녁까지 관광지를 돌아다니기보다는, 베짱이처럼 맛있는 음식 먹고 충분히 쉬고 쿨쿨 잤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하고 싶었던 공부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친구들은 일주일에 두 번 한국어 수업을 온라인으로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세종학당이라고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정부에서 주관해서 그런지 정말 최소한의 수업료만 지불하면 (책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2-3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2시간 정도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초급부터 고급까지 있고, 내 친구들은 무려 BTS와 함께 배우는 한국어라고 무료로 신청하는 수업을 들었다. 다른 수업과 다르게 초급에서 중급까지를 빠르게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최신식 볼펜으로 종이에 찍으면 음성이 나와 듣고 바로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강 신청은 눈 깜짝할 사이에 품절(?)이 되어버렸다. 이탈리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학생이 모였는데. 예를 들자면, 이미 한국어가 능숙한 친구도 있었고, 방안에 BTS뿐만 아니라 각종 K-pop에 영화 포스터까지 붙인 친구는 물론, 아기를 잠깐 남편에게 맡기고 틈틈이 공부하는 친구, 그리고 바쁜 와중에 수업을 안 놓치기 위해 주차된 차에서나 심지어 버스에서도 듣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모두 하나같이 한국 문화와 한국어에 열렬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수업의 아쉬움을 꼽자면 아무래도 한국어만큼 이탈리아어나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한국어 선생님이 없다 보니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질문 자체를 이해 못 해서 서로 답답해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짧은 수업 동안 너무 많은 진도를 한꺼번에 나가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진도를 못 따라가서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심지어 시험은 수업보다 더 어려워서 합격하는 학생도 매우 드물었다. 오해하지 말기를. 한 명의 선생님을 탓하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프로그램의 단계를 좀 더 낮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취미로 배우는 언어가 그렇게 까지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여담으로 이탈리아에서도 교수나 선생님이 그렇게 학생들의 편에 서서 지지해주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거의 학대 수준으로 실력이 좋지 않으니 더 분발해야 한다고 닦달하는 쪽이어서 여기도 가끔 학업 스트레스와 주위의 시선을 못 버텨 자살하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친구들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선생님에게 무례하지 않으려고 어렵냐고 질문하면 항상 괜찮다고 얼버무렸다. 뒤에서는 너무 헷갈리고 빠른 진도에 우울해하는 친구들을 보니 혹여나 한국어에 대해 흥미를 영영 잃을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실제로 몇몇 친구들은 문법 수업 이후에 이해가 전혀 안 돼서 울고 있는 모습도 봤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끝에, 내 친구들은 결국 사이좋게 나란히 낙제를 했다. 상심이 컸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좀 더 느린 진도의 수업으로 듣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나마 한 번 들었다고 그때만큼은 어렵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한국인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 통계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살고, 실제로 시내에서 여행객들만 가끔 봤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만난 적이 없다. 동양인 자체가 로마에서 비해 현저히 적어서 길에서 다니면 눈에 많이 띄었다.
여전히 티브이를 틀면 남한보다 북한 뉴스가 더 자주 나왔다. 그나마 이제는 BTS 음악을 더한 삼성 광고나 봉준호 감독 아니면 오징어 게임 관련 보도자료라도 나왔던 것 같다. (아, 싸이의 말춤은 아직도 가끔 나온다.) 그래서 여전히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란 케이팝에 집중한 마니아층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 요컨대 오징어 게임은 알지만 한국 드라마는 못 봤다고 하는 느낌이랄까...?
이탈리아는 유럽 중에서도 영어를 "못"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프랑스가 자기 나라 부심이 강해 영어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심지어 캐나다의 퀘벡 주도 그러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막상 하면 잘하는데, 하다가 발음이나 문법이 틀리면 서로 놀리거나 굉장히 창피해했다. 덕분에 다들 입을 닫는 바람에 심도 있는 대화는 못했지만, 한편으로 늦깎이로 캐나다에 이민 와서 적잖이 주눅 들었었는데 알고 보니 나만 (특히 동양인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게 큰 위안이 됐다. 이래서 다들 세계를 둘러보고 눈을 키우라는 얘기를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