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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Nov 15. 2019

고생했어

시원섭섭하다. 자리를 잡고 웅장하게 서 있던 그 모습이 어제 같은데... 너를 이렇게 떠나보내는구나. 이 친구는 SIEMENS사의  PRIMUS 선형가속기다. 지난 2003년 10월 4일 토요일, 첫 환자를 시작으로 오늘 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약 16년 동안 방사선 치료에 맡은 바 소임을 다 했다. 우리 친구는 오늘부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우리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모습은 처음과 같았다. 텅 빈 치료실에 근엄하게 서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분해되고 잘라지며 해체될 것이다. 주말이 지나면 웅장하게 서 있던 이 친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겠지. 눈물이 날 정도로 기억 날 것이다. 2003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이 친구와 함께 암환자를 치료했던 기억이 내 가슴 깊숙이 남아 있다. 또한 함께 눈을 마주친 암환자분들도 내 가슴 깊숙이 남아 있다.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수많은 암환자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고맙고 그동안 고생했어. 감사해.


새로운 친구가 이제 그 역할을 할 것이다. 기대가 된다. 어떤 모습으로 전에 있던 친구만큼, 아니 더 멋지고 확실하게 또한, 정확하게 그 몫을 다 할지 내심 기대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또한 실망스럽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없다. 우리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장갑을 끼고 옷매무새를 추스른다.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걱정은 되지만, 방사선 치료에 소임을 다 할 새로운 친구를 위해, 우리는 열심히 달릴 것이다. 제발, 새로운 친구가 암환자에게 밝은 희망이 되길 바란다.


Photo by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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