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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08. 2021

정수기와 이기주의자

결혼생활 15년, 지금까지 살면서 정수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집에서 먹는 물은 대부분 끓이거나 때론 마트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다. 정수기는 우리에게 생활필수품 목록에서 거리가 멀었다.


어느 날 아내가 인터넷에 올려진 기사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정수기를 사야겠어.”

“왜? 지금까지 끓여 먹었는데.”


아내는 단호하게 내게 말했다.

“수돗물 필터로 걸러진 사진 봤어?”

“아니”


아내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수기 좀 알아봐요!”


나는 정수기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자 인터넷으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다양한 상품과 구매 방법들이 존재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수기에 관한 정보를 습득했다. 기본에 충실한 제품부터 첨단 기술이 녹여진 최신 상품까지 찾아봤다. 정수기 선택은 참 어렵다. 구매 방법도 그렇다. 상품 자체를 구매할지 아니면 빌려 쓰는 형태인 렌트로 할지도 고민이 되었다. 결정 장애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의심이 들기도 했다.

반나절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원론적인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정수기는 물만 잘 걸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찾아봤다. 전기도 필요 없고, 스스로 청소할 수 있는 제품이 있었다. 심지어 부담스러운 가격도 아니다. 바로 결재를 했고, 아내에게 통보했다.

“샀어.”


아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샀어?”

나는 그 말에 어이없이 대답했다.

“사라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사지…”

“이미 샀어. 말 그대로 정수만 되는 정수기야. 냉온 정수기 그런 거 아냐.”

“…”


말없이 주방으로 도망가는 아내의 뒤통수가 보였다.

“뭐야? 정수기 필요 없던 거야?!”

“아니, 있으면 좋지. 맨날 물 끓여 먹는 것도 일이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 보니, 걱정도 되고.”


나는 괜한 공포심에 정수기를 구매하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대충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주방에 있던 아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늙어서 괜찮지만, 아이들은 아직 젊고 크고 있는데. 당신은 걱정 안 돼?”

“끓여 먹으며…”


내 말은 허공에 머물렀다. 이후 거친 파도 하나가 나를 덮쳤다.

“내가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정수기 하나 사 달라는데. 그것도 못해줘! 내가 결혼을 잘 못했지. 아이들 아프면 다 당신 때문이야. 이기주의자!”


난 한 순간 이기주의자가 되었다. 반나절 정수기 선택에 시간을 할애해서 구매를 했는데. 어쩌다 구매와 동시에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정수기가 우리 주방 왔다. 아주 아담한 크기다. 차가운 물은 안 나온다. 뜨거운 물은 당연히 없다. 마셔봤는데 미지근하고 밍밍한 물이다. 다만 수돗물 특유의 맛은 느끼지 못했다. 정수기는 맞나 보다.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잘 쓸게요~ 고마워~”


이기주의자는 답했다.

“돈 안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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