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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May 30. 2019

폭풍 잔소리

아내의 주특기

새벽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지금 어머니께 받은 사랑만큼 아내도 아들을 위해 새벽부터 김밥을 싸고 있다. 곤히 잠드는 동생 옆에서 아들은 트럭 하나가 지나가는 소리로 코를 골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꿈나라에 있다. 식탁에 앉아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본다.




화창한 오후다. 퇴근 후 미리 약속한 장소에 아내와 만났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1+1 행사. 나는 굳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행사기간이라 이참에 꼭 사야 한다고 했다. 마지못해 갔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르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내와 길을 걷고 있었다. 저 멀리 대형 가전제품 매장이 보였다. 아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오빠, 나 정말 냉장고 사 줄 거야? 우리~ 생각해보니 결혼 13년 차인데. 이 정도면, 남들은 가전제품이다 가구다 뭐 웬만한 건 싹 다 바꾼다는데.”

빤히 내 얼굴을 보며 나의 답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나는 말했다.

“아직 멀쩡한데... 왜 10년 차 넘었다는 기준을 가지고 바꾸려고 해? 그런 논리가 어디 있어~”

역시 나의 대답은 틀렸다. 아내의 폭풍 잔소리는 나의 몫이 되었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그럴 거야? 내가 오빠랑 10년 넘게 살아 줬으면 냉장고는 바꿔줘야지. 내가 뭐 비싼 최신 냉장고 사 달라고 했나? 아이들도 커가고 반찬 넣을 곳도 부족한데. 용량 큰 양문 냉장고 하나 사 달라는 이야기지. 왜 그래?”

지금 나는 스크루지가 되었다. 말을 멈추고 잠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 이내 아내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된다.

“나는 내년에 이사 갈 때 최소한 냉장고는 꼭 사수하겠어. 오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생각난 게 있는데... 음...”


순간 또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빛의 속도로 먼저 선수 쳤다.

“음. 그럼 다 사 줄 테니 말해봐. 어차피 이사는 가야 하니깐. 그때 사줄게. 단, 지금 말해야 해.”

아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쇼윈도에 비친 가전제품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안 속아. 냉장고는 당연히 바꿔야 하고. 아들이 지난주에 뭐라고 한 줄 알아?”

나는 고민하고 생각하는 척했다. 그래도 들어줘야 한다. 잠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들이 이렇게 말했거든.”

“엄마. 나 투명한 물 먹고 싶어. 나만 왜 그래? 친구들은 학교에 올 때 집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 받아 오던데. 그런데 내 물은 갈색이야. 우리도 정수기 사서 투명한 물 먹으면 안 돼?”

나는 고민도 없이 바로 응수했다.

“참 어이없네. 보리차 물이 얼마나 좋은데. 건강에 좋은걸 아직 모르네. 아직 어려서 그래.”


잠시 침묵이 흐르며 아내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내가 당신 공부하겠다고 지금까지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난 한 푼 한 푼 아꼈는데. 당신 대학원 등록금도 내 손으로 다 해 줬는데. 뭐?! 겨우 양문 냉장고 하나 때문에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 기억해~ 첫 째 뱃속에 있을 때 골프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맨날 늦고 온 거. 죽을 때까지 기억할 거야."


예사롭지 않은 눈초리로 다시 추가 공격을 이어간다.

“역시 속아서 결혼했어. 정수기 물 먹고 싶다는 아들은 내 얘야? 가만 보면 계부처럼 굴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사 갈 때 정수기도 꼭 사줘요. 명심하세요. 냉장고 없으면 나 따로 살 테니. 그렇게 알아요!”


역시 아내의 폭풍 잔소리에 토를 달면 안 된다.

난 이제 스크루지 영감탱이 계부가 되었다.


그래도 멋진 가전제품을 보아하니 그렇게 원하는 양문 냉장고를 사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 이맘때면 아마도 지금처럼 아내의 폭풍 잔소리와 함께 양문 냉장고를 고르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들이 그토록 원하는 정수기도 알아보고 있을 테니 돈을 모아야겠다. 새벽부터 1시간 넘게 출근해서 밤낮으로 일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냉장고는 분명 내 돈으로 사 줘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 조금씩 돈을 모아야겠다.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의 폭풍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다. 


“앗차”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하나 있었다. 귀여운 병아리처럼 내 옆 찰싹 붙어서 사탕을 먹으며 쫑알쫑알 거리는 녀석이 하나 있다. 귀여운 딸. 딸은 아빠를 좋아한다. 아마 엄마보다는 내가 우선일 테다.  이 작은 숙녀도 내게 또박또박 웃으며 말을 한다.

아빠. 나도 나도. 저기 냉장고 사줘




스크루지 계부 앞에는 주특기가 폭풍 잔소리인 그녀가 앉아서 열심히 김밥을 말고 있다.

나는 아들의 김밥 한 줄을 먹으며 그녀에게 물어본다.

“김밥 맛있다. 소질이 있어. 우리 부업으로 돈 좀 벌어서 냉장고 살까?”

“오빠~ 스크루지 영감처럼 자꾸 그럴래~ 늙어서 찬밥에 물 말아먹지 않을 생각이면 잘 생각해 봐요!”

잠시 잊고 있었다. 폭풍 잔소리.


-마지막 김밥 하나 그리고 갈색의 결명자차(보리차에서 바꿨다)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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