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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Jun 13. 2019

유일한 세계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

그날도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평소와 다름없다. 혹여 지각을 할까 봐 걱정하며 급하게 걸어가는 인파 속에 나를 집어넣는다. 길고 육중한 몸체를 가진 전기로 움직이는 기차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나는 그 배 속으로 들어간다. 1시간 30분 동안, 위라고 생각하면 이미 소화되었을 것이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나. 


한 주에 한 번 강의가 있다. 평소처럼 오늘도 긴 구조물 속에 나를 맡긴다. 


소리가 요란하고 속이 훤히 보이는 긴 비단구렁이 뱃 속이다. 아주 부드럽다. 1 토막 2 토막... 총 8 토막이다. 1 토막은 어림잡아 20m 정도다. 내가 있는 이곳은 약 160 m 길이로 된 긴 공간으로 예상된다. 1 토막 안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뼈가 약 55개나 있다. 운이 좋다면 이 곳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운이 좋다는 가정이 꼭 필요하다. 이 뼈의 길이는 약 30 센티미터(센티) 정도다. 30 센티 길이 문구용 자가 갑자기 생각난다. 나이 두 엉덩이는 이 30 센티 자 안에 그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또 다른 엉덩이가 힘들어한다. 


운이 좋지 않다면, 30센티는 약 절반으로 줄어든다. 여러 사람들이 뻗은 기다란 촉수에 나의 두 팔은 차렷 자세 혹은 오른손/왼손 깃발 올리기 놀이는 필수가 된다. 이와 함께 내 기다란 발바닥은 튼튼한 구렁이 뱃가죽에 잘 붙어 있어야만 한다. 아무래도 구렁이가 흔들거릴 때마다 균형을 잡기 힘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약 15 센티 안에서.....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가 있다. 다른 구렁이 뱃속으로 가서 나를 이동시킬 때다. 주저하면 안 된다. 시간이 나를 그곳으로 재촉한다. 작은 생각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다른 비단구렁이를 찾아가면 된다. 아주 쉽다. 


소리가 요란하고 속이 훤히 보이는 긴 비단구렁이가 내 앞으로 지나간다. 단지 줄무늬 띠 색깔이 진한 갈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쌍둥이처럼 똑같다. 문득 나는 그 뱃속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싫었다. 구린내 나는 뱃속처럼 느껴졌다. 나의 몸을 그곳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소화되기 싫어서 일 수도 있다. 지금 바라보는 이 지점에서 잠시나마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구역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질지 모른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와 같다. 그곳으로 그들은 길이 약 30 센티 혹은 15 센티를 이겨내며 싸운다. 대단하다. 자신이 선택한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어떤 걸 선택하든 모든 결과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어디로 갈지 스스로 분명히 알 것이다. 구린내 나는 구렁이 뱃속 일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꿈을 꾸고 힘듦을 알고 이겨낼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서 초록이 우거진 숲과 함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드높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모두가 약 160 m 길이 중 약 30 센티 혹은 15 센티의 자신의 세계를 선택한다. 작지만 큰 세계다. 어렵게 선택한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 스마트폰, 명상, 멍 때리기, 여자 친구 상상하기, 머리 만지기, 옆 사람 쳐다보기, 욕 하기, 노려보기, 싸우기, 전화하기, 큰소리치기, 시험공부하기 등 엄청난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1시간 30분이라는 <유일한 세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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