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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02. 2019

꿈에서

지금 필요한 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에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뒤통수가 보이고, 옆에는 새까맣고 깊은 절벽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움직인다. 굽 여진 사람들의 긴 줄은 흡사 커다란 보아뱀이 어디론가 먹이 사냥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내 뒤가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저만치 맨 앞줄에 책상이 보이고, 누군가 앉아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목을 굽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그는 절벽 아래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나는 놀란 나머지 내 앞사람의 뒤통수와 저만치 책상을 번갈아보며,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기 위해 모든 감각세포를 깨우고 있었다. 집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상황을 추정해 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출판 기념 사인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저 멀리 책상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좌우로 낭떠러지에 떨어지며 괴성을 지르며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불안하다.


순간 이동을 했다 싶을 정도로 앞사람의 뒤통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어깨너머 그 존재를 확인했다. 어? 일순간 가슴을 울리는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친구 혜란이다. 그녀가 왜 기념 사인회에 어느 작가처럼 앉아 있을까. 책상에는 음료수와 맥주캔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뭔가 고뇌하고 있다는 걸 책상이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과 형체는 희미하다. 다만 내 기억에 각인된 정지된 화면처럼 보였다. 반가운 마음과 눈빛으로 혼자 아는 척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뒤통수만 보이든 앞사람은 소리 없이 괴성을 지르며 절벽으로 떨어졌다. 내 발은 자연스럽게 한 발 나아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뿐이다. 그녀는 움직임이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지? 

내 발아래 걸쳐진 절벽을 보았다. 어두 컴컴하고 꽤 깊다는 걸 느낀다. 저기에 떨어지는걸 원치 않았다.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그곳에 떨어지면 절대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마른침을 조심스럽게 꿀꺽 삼키며, 나는 절벽에 떨어진 모든 사람과 똑같이 고개를 책상 앞으로 떨구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분명히 듣고 보았다. 장난기 있는 말투와 진실된 말을 듣고자 하는 눈빛.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초조함을 갖는다. 하지만, 접착제가 발라진 듯 두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내 발아래에는 거대한 입이 벌어진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영화의 한 장면이 바뀌듯 알 수 없는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느 무더운 여름, 아침부터 일을 하고 저녁이다. 그녀는 문을 열고 주방에 들어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 상을 준비한다. 잠시 멈춘다. 시원한 에어컨도 없는 건조한 공기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한 줄기 땀 방울이 검은 머리카락에 감춰진 관자놀이에서 스르르 미끄러진다. 이윽고 그녀는 커다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다. 얼음처럼 차갑고 시원한 냉기를 흩날리는 작은 맥주 캔을 꺼낸다. 청량한 소리를 내며 시원한 맥주를 마신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그녀. 나는 분명 기분 좋은 얼굴 표정을 보았다.


그렇게 소리 없이 그녀에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말했다. 내 앞에는 희미한 잔상으로 얼굴 하나가 보인다. 무슨 표정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시원한 맥주 한 캔에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정답을 맞힌 것일까. 친구의 표정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이 열린다. 경직된 근육은 서서히 풀리며, 창밖에 불어오는 아침 바람을 느낀다.


시원한 맥주 한 캔

초조하게 시험을 보고 난 후 정답을 맞힌 쾌감을 느낀다.

시원한 맥주 한 캔에 행복해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에 에스컬레이터로 급히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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