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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홍 Aug 05. 2019

마트에서

아빠와 악당

퇴근길, 아내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게 되었다. 결혼 후, 한 집에 살 때는 입이 두 개라 마트 갈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주말을 잘 보내기 위한 맛난 고기 한 근과 절대 떨어지지 않아야 할 쌀이 전부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입이 두 개 더 늘었다. 그만큼 마트 올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입이 짧은 우리처럼 아이들도 입이 짧다. 오히려 마트에서 장을 보는 시간보다 우리 부부가 평소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다. 대화를 위한 데이트 장소인 샘이다.


마트에서 내가 할 일은 뻔하다. 그냥 바구니를 들고 있으면 된다. 가끔 내가 사고 싶은걸 그곳에  떨궈 넣으면 된다. 아내는 저만치 물건을 보고 있다. 뭘 사는지 감시할 생각은 없지만, 양손에 아이스크림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자동으로 아내에게 다가가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또?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냐?”

“이 정도 가지고 뭘. 아이들도 좋아하고, 일주일에 한 번 세일할 때 사는 건데.”

“집에 아이스크림 있던데.”

“집에 아이스크림 없거든요!”

“누가 다 먹는 거야?”

아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나는 못 먹어봤음. 당신이랑 아이들이 다 먹어 놓고서는, 당신이 좀 사던가. 아니면 잔소리 그만해요.”라며 꾸짖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바구니에 넣은 아내를 지켜보며 쓸데없는 말을 또 했다.

“나 저거 싫은데. 저건 안될까? 맨날 똑같은 거 말고, 저거 말이야. 이건 맛없던데. 그리고 이건 아들이 좋아하는 거고. 아이참. 정말 이건 딸이 좋아하잖아. 우리 딸.”


나의 잔소리에 반응하는 그분의 표정은 시원한 마트를 한 번 더 얼려버리는 듯했다. 아내의 눈은 아이스크림이 가득 찬 냉장고를 응시한 채 내 귀에 깊숙이 숨어 있는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우리 딸? 나는 안중에도 없어! 당신 먹을 건 당신이 골라요. 근데, 딸이 좋아하는 건 다 사고, 아들은? 자꾸 이럴 거야? 아들은 자식도 아냐?”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공격을 계속한다.

“아들도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계부처럼 왜 그래? 사람이 왜 이래? 언제는 아들이 좋다며? 딸보다 아들이 좋다며? 아들도 내 뱃속에서 나왔어. 이거 왜 이래. 계부처럼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괜한 말을 했다는 자책감을 뒤로 한채 이참에 아들을 상대로 험담을 시작했다.

“나 계부 아니거든. 그리고 아들은 말도 안 듣고 맨날 핸드폰 게임이나 하고. 놀기만 하고, 쯧쯧.”

“당신 아들이라고. 주워 왔어요? 아이한테 관심 좀 가져요. 자꾸 딸만 오냐오냐 하지 말고.”

“어… 알았어.”


우리의 대화가 득도 없이 끝날 것을 알면서 나는 포기하고, 빨리 마트에서 나가자고 말을 했다. 이런 나를 보며 아내는 문득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내게 물어봤다.

“아들이 어제 꿈을 뭐 꿨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내는 아이스크림을 바구니에 담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어제 꿈에서 타노스가 싸우고 있는데. 아빠가 나왔어. 근데, 아빠가 타노스 편에 붙어 자기를 도와주지 않아 속상했어>라고 말했어.”

“뭐. 타노스?”

내 머리는 몇 단어와 함께 타노스를 정의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영화 <어벤져스>에 나오는 <최고의 악당>, 근육질에 머리와 턱이 이상하게 큰 <파란색 악당>, 손가락 하나 튕기고 싶어서 자식이고 뭐고 없는 <비열한 악당>, 함께 싸운 동료 악당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 어느 행성에서 사색하며 농사짓는 <비겁한 악당> 등. 드디어 내 머리는 함축하여 <타노스 = 악당>라고 간단히 결론을 내린다.


“꿈속에 타노스랑 싸웠는데 내가 타노스 편에 붙어서 아들을 공격했다. 이거지?”

타노스 옆에서 앞에 서 있는 아들과 대치하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데. 당신 아들이 이렇게 말했어. <타노스보다 아빠가 더 싫어> 당신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웃음이 나와? 아직 애라고. 어떻게 타노스보다 못해.”

“정말. 이 녀석. 타노스보다 싫다 이거지.”

아내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며 바구니를 낚아챘다.

“아이들에게 관심 좀 가져요. 아들이 당신 때문에 가출하면 나도 가출할 테니. 딸이랑 둘이 살던가. 아빠가 타노스 편에 들어서 속상했다고 하잖아. 평소에 얼마나 그랬으면 꿈에서도 그랬을까. 말 다했지 뭐. 딸만 신경 쓰지 말고 아들한테 좀 신경 써요!”

나는 카운터에 올려진 바구니를 보며 “아빠 > 악당(타노스)”라는 수식을 떠올렸다.


마트는 우리 둘만의 접선 장소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우리는 접선한다. 오늘 마트에서 얻은 정보는 충격과 공포 그 이상이었다. 아들의 꿈속에서, 악당과 한편인 아빠는 아들을 배신했다. 마블 최고의 악당 타노스보다 더 나쁜 존재로 말이다. 편애의 결과는 참담한 결과를 낳는 줄 조금 깨닫는다. 우리 딸, 우리 아들인데. 나는 우리 딸, 당신 아들처럼 편애하고 있었다. 어쩜 꿈속에서 아빠라는 존재가 배신하는 적으로 비친 걸까. 며칠 동안 잔소리하지 않고 무한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집단에서 악의 축에 끼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접선을 끝내며 아내는 마지막 일침을 놨다.

“당신 때문에 아이들 가출하면 늙어서 찬밥에 물 말아먹을 줄 알아요!”


[메인 사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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