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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혁 Nov 17. 2019

디자인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몇 년 전부터 과연 '좋아서 하는 일'이란 게 있을까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좋아서 하는' 것과 '일'이 과연 동등한 위상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상식적으로 일이란 고된 것이고 좋아서 하는 일은 고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고된 일을 좋아서 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 그렇다면 진솔한 의미의 '좋아서 하는 일'이란 과연 무사히 성립 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일까. 아니라면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적어도 내 주변에는 해답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만도 했다.

 

 보통 자신의 일을 마냥 좋아서 할 수만은 없는 건 애정을 가진 대상으로부터 실제 그 대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수고로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취미로 마주한 일일수록 더욱 그럴 확률이 높다. 내가 평생을 애정하던 취미지만 막상 업계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는 것과 같다. 이때 어딘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면밀히 보면 소비하는 것과 생산하는 건 전혀 다른 일에 가까운 것일 뿐. 그렇기에 누군가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직업인 감독이나 제작자 일은 그와 맞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SNS를 열렬히 운영하지만 타인의 것을 홍보하는 온라인 마케터로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는 '영화'를 좋아했지 '영화 만들기'를 좋아한 게 아니며 'SNS에 자신의 일상 올리기'를 좋아했지 'SNS 운영하기'를 좋아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좋아서'와 '하는 일'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과 '일'을 연결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원리라면 디자인을 좋아한다고 해서 디자인 '하는' 걸 좋아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디자인(design)의 사전적 정의를 한 번 보자. 영어 단어 'design'에는 '디자인'의 의미 뿐만 아니라  고맙게도 동사의 의미, 다시 말해 '디자인을 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I love design'이라 말한다면 이 안에는 '나는 디자인을 사랑한다'와 동시에 '나는 디자인 (하는 걸) 사랑한다'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길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취미로 디자인물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반면에 무언가를 디자인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있다. 디자인에는 자연스럽게 '디자인하다'라는 맥락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이는 'movie'나 'social networking service'에 '영화를 만들다'와 'SNS를 하다'의 의미가 배제된 것과는 상반된다. 디자인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디자인 하는 일을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득 처음 디자인을 좋아하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과거 디알못 중에서도 디알못이었던 나는 잠시 몸 담고 있던 한 교육 단체에서 디자인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되도 안되는 나의 첫 작업들물을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하게 된 포토샵 스터디의 역사적인 첫 번째 작업물들이었다.


"이건 잘했는데? 음. 이건 최악이야."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포토샵 스터디에서 만든 앨범 재킷 디자인들이었다. 포토샵의 기본 도구를 배워가던 때라 이미지와 텍스트의 드래그 앤 드롭만으로 단순히 만든 수준에 그쳤다.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좀 예쁘다 싶은 사진을 가져와 적당히 어울리는 폰트로 제목을 써넣은 게 전부인, 사실상 디자인이라 하기도 민망한 포토샵 예제 습작물 정도. 당시에는 이마저도 고심끝의 결과물이었다. 심지어 글씨의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도 잘 몰라 한참을 색깔도 바꾸고 위치도 바꿔보고 정신이 없었다.


 타인의 작업물들을 열심히 보며 만든 모방에 그친 작품이었지만 잘 된 디자인을 보는 일이 좋았고 이를 보잘것 없이 따라하는 일 또한 좋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몇몇 결과물에서 괜찮다는 평을 받기도. 디자인을 좋아하니 디자인 하는 걸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시나 시작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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