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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혁 Nov 17. 2019

디자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한 인간의 미시사에서 디자인이 대두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학교 과제를 위해 피피티를 만들 때, 동아리를 홍보할 전단물을 제작할 때. 하지만 실제로 '디자인'의 감각과 흥미를 자극하는 순간은 본인이 직접 무언가를 창작해야 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이전 단계에 있다. 너무도 당연해서 굳이 인식하지 않는 어느 찰나의 순간, 당신의 감각은 이미 디자인을 결정 짓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 상황에서 당신의 '미적 기준'이 자극 받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수업에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작가의 삶과 문학의 가치에 대한 피피티를 만들어 발표를 해야한다고 가정해보자. (불어불문학과라는 전공을 성실히 살렸다.) 공교롭게도 학교 도서관의 '이방인'은 모두 대여 상태이며 발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책을 구매하러 서점으로 가야만 한다. 교보문고의 외국 문학 섹션, 그중에서도 프랑스 문학의 진열대로 향하자 '이방인'이라는 같은 이름을 단 수많은 출판사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 둘 꺼내 살펴보던 당신은 이제 과제를 위해 단 한 권의 번역서를 구매해야만 한다. 그 순간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책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불문학도인 나는 '민음사'의 번역이 좋다는 조금은 특별한 기준 정보를 알고 있기에 해당 출판사의 책을 고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수업을 위해 그저 어떤 책이든 한 권 손에 넣어과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림판으로 대충 그린듯한 유광 코팅 표지의 '이방인'과 튼튼한 하드커버에 전후면 정성들인 커버 종이를 두른 '이방인' 중 어느 책을 선택할 것인가. '책 표지 디자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명확한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이 순간만큼은 개인이 '디자인' 혹은 어떠한 '미적 기준'을 발현하는 무의식의 시간이다. 


  중요한 건 디자인을 배우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Yes or No'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잘 된 디자인과 잘 된 디자인 중 더 잘 된 디자인을 고르기는 어렵지만 좋지 못한 디자인과는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 미적 기준만으로도 충분히 '디자인'에 입문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세상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은 '디자인'되어 있고 인간의 눈은 끊임없이 이를 스캔하고 분류하며 진화해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디자인을 공부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랍겠지만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상 디자인, 편집 디자인, 간판 디자인, 공간 디자인 등을 공부하고 있는 부전공생인 셈이다. (전공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관심에 따라 실력 차이는 있겠지만 10년이 지난 뒤 훌쩍 커져 있을 당신의 안목을 생각해보라. 여기서 관건은 바둑알을 두는 플레이어인가 아니면 옆에서 훈수를 두는 구경꾼인가 하는 문제다. 어느 쪽이든 경기를 위한 룰은 익히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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