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나는 아직까지 '왜 디자인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불어불문학과 심화전공을 했던 내가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음에도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만난 이는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를 묻지만 궁금증은 대부분 거기까지. 무얼하든 '먹고사니즘'으로 해석하는 일이 잦아지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러려니 이해하는 듯했다. 물론 타인의 '왜'에 집중하기에는 개개인의 삶이 너무도 벅차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왜'를 묻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일지도.
그렇다면 시점을 조금 돌려 스스로에게 집중해보자. 지금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는 나는 왜 이 일을 지속하고 있는가. 이제는 더 이상 진로를 탐색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왜 이 일을 배우려하고 행하려 하는가. 3년 전만 하더라도 나의 대답은 그저 '재밌잖아' 혹은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정도에 그쳤으리라. '야, 너도 할 수 있어.'와 같은 야나두 정신이면 재밌고 즐거운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조금 더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인 바이브가 있었다. 하지만 열정은 그만큼 사람을 소진시켰고 나는 스스로를 설득할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디자인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분산 투자자였다. 시간과 노력이라는 대학생만의 특권같은 자본을 긁어모아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 분야들에 거침없이 투자했다. 크게 잃기도 때로는 많이 따기도 했지만 크게 중요치 않은 놀음이었다. 결국 청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무궁한 바다를 헤엄치는 열정의 시기였고 손실의 대가는 당시에는 실감할 수 없던 그저 '시간' 정도의 무한한 재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의 대학생들 중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크고 넓은 배포를 지닌 투자가였다. 매번 이와 같은 투자를 할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어느 정도 들어갈 지 가늠자를 잡았다. 그리고 '왜 디자인을 하려 하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평생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일'이었다.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모든 투자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만족한 적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렇다면 당신은 왜 디자인을 하려고 하는가? 앞서 나온 자문자답식 질문지와는 다르게 말미에 물음표를 붙인 건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주변 누구에게도 쉽게 듣기 어려운 '왜'에 대한 궁금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좋다. 디자인을 전공해 앞으로도 배워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던지,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된 디자인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라던지. 물론 모든 일에 있어서 '왜'는 중요한 화두이지만 '디자인'만큼 결정적인 분야가 또 없는 것 같다. 성실히 도출해낸 '왜'는 개인이 디자인에 투자해야할 시간과 노력의 크기를 결정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흥미를 잃지 않고 지속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음 다섯 개의 이유를 생각해보자. 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이유에 유사한 선택지 하나를 골라보자.
1. 예술에 대한 운명적인 필연성을 직감해서
2. 훌륭한 작업물들을 보다 매료되어서
3. 스스로 시각적인 무언가를 창작해보고 싶어서
4. 취직 혹은 이직 준비를 하며 필요성을 느껴서
5. 과제 혹은 업무로 인해 불가피하게 맞닥뜨려서
...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개인의 이유가 있으리라. 만약 누군가의 이유가 1-3에 가깝다면 디자인에 대해 조금 깊이 있게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반대로 4-5번의 이유라면 상대적으로 기술적인 접근에 가깝다. 중요한 건 어디에 위치해 있든 자신이 서있는 그곳에서 가늠자를 잡으면 된다는 사실이다. 신기하게도 디자인은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빠져나오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특히나 늦게 접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당신이 생각한 수준 그 언저리에 도달할 때쯤 그 다음 이유, 그 다음 이유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당신의 이유가 1번이라면 주저 말고 땅을 파도 좋다. 내려갈 수 있을만큼 내려가도 걱정할 필요 없는 게 바로 디자인이다. 2번 혹은 3번이라도 좋다. 자신이 생각한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만 가도 충분히 신선하고 흥미로운 체험이 될테니 말이다. 나는 조금 무리해서 저 끝까지 파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