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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혁 Nov 17. 2019

어떻게 시작해야 맞는 건가요?

 자수성가의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멋있다. 솔직히 시샘 반, 존경 반. 물려받은 재산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남들에게 인정 받으면서 사는 삶. 사실 돈보다도 이들이 쟁취해낸 삶의 밸런스가 부러웠다. 그들이 가진 여유를 보라. 고생했던 과거를 자신의 이야기로 녹여낸 지금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말이다. 저점에서 고점으로 이어지며 균형을 맞추는 자수성가형 스토리는 한번쯤 꿈꿔볼만한 인생의 궤도였다. 고점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꾸준히 서행하며 상향 궤도로 진입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지 않을까 싶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건가 묻는다면 아니다. (사실 맞지만 맥락을 위해서.) 지금 얘기하려는 '자수성가'는 조금 다른 맥락이다. 비전공자가 늦게 시작한 디자인으로 먹고사니즘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자수성가'. 물론 "이게 바로 내 얘깁니다"하고 시작하면 참 좋으련만, 아직까지는 '자수'에 그쳐 '성가'하지 못한 삶이다. 그래도 조금 부족하지만 '자수(手)'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디자인 전공도 아닌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3년 전 제일 명쾌하게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누군가 나타나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작해서 이런 코스를 밟고 이런 일을 하게 된다면 당신은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실 수 있을 거에요.'라는 사전적 정의에 가까운 조언을 해준다면 좋았을텐데. 


'제 손만 잡고 따라오신다면 그 꿈, 이뤄드리겠습니다. 잘 되고 나서 저 잊으시면 안돼요.' 


 좀 더 나가서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데려가주길 바랬다. 사실 멘토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내가 읽은 책, 내가 들어본 강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좋았다. 실무적이지 않은 지극히 원론적인 디자인 비기너 가이드! 온전히 내 삶을 맡겨도 될만한 정확한 지침이 담긴 안내서! 비전공자로 업계에 진출한 선례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자신의 노하우를 전달해주기 너무도 좋은 세상이기에 


 돌이켜보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저마다 다른 환경, 다른 변수에 있는 사람에게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해서 해답인 양 전수할 수 있을까? 설령 나와 같은 환경에서 출발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배우고 싶은 분야, 일하고 싶은 분야가 모두 다르고 이와 같은 차이가 전혀 다른 과정을 설계할 수밖에 없을텐데. 성공한 디자이너의 책들을 보면서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대단히 뛰어난 위치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와 위치가 달랐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으로 나의 미션지를 받아들었다고 해도 내가 헤쳐가야할 문제이자 내가 다시 만들어야내야할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명망있는 디자인 대학원으로 가서 네이버에 입사한 UI 디자이너가 된다면 나는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하겠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결국 고민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당시 나의 고민에는 가장 결정적인 오류가 하나 있었다. 바로 '디자이너로서의 시작'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디자이너'란 수많은 선수들이 참여하는 레이스에 뛰어들기 위해 이제 막 몸을 풀어야하는 초보 선수였음에도 출발선 위에 어떤 자세로 서야 더 빨리 달릴까를 고민했던 것이다. 출발선 위에 서는 일, 그리고 더 빠른 도약을 위한 준비 자세는 그 시점의 나에게는 오히려 무의미한 일에 가까웠다. 레이스에 설 수 없는 선수에게 경기장 위의 시뮬레이션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달릴 수 있는 능력, 그게 필요했다. 그렇기에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시작점은 다름 아닌 '디자인'이다. 이게 무슨 당연한 얘기냐 하겠지만 의외로 디자이너란 말에 홀리기 쉬운 게 사실이다. 


 디자이너의 시작에 '어떻게'라는 정의는 없다. 기회를 찾아다니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이듯이 디자이너로 먹고 살기 위해 행동하는 자는 분명 어느 시작점 위에 서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멀리 있는 일이란 사실. 이에 앞서 디자인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임의로 생각하던 '시작'이란 게 생각보다도 더 멀리 있는 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디자인의 시작'이 아닌 '디자이너의 시작'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지점에 서있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디자이너'로서의 도약에 대해 애를 먹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할 일은? 디자인을 단련하면 된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로 마음 가는대로 만들어보면 된다. 이 순간 필요한 게 바로 '자수(手)'.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분명 가닥은 잡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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