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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종혁 Nov 17. 2019

디자인은 모르지만 디자인을 합니다

 나는 오늘도 맥북과 씨름 중이다. 프로젝트를 위한 개인 작업부터 외주 일까지 밀려 정신이 없다. 일이야 대충 하면 편하겠건만. 개인 작업이야 안 하면 그만이겠건만. 나에게는 그럴 수 없는 여러가지 웃픈 이유가 있었다. 또 말썽이었다. 점점 느려지는 포토샵 때문에 어느샌가 노트북을 재부팅하는 일도 잦아졌다. 내 밥줄이자 오랜 친구이지만 이제는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컴퓨터를 다시 껐다 켜는 동안 나는 척추와 목을 일자로 펴는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한다. 지금 내가 몰입해 있는 이 삶이 과연 맞는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하는 건 아닐까. 이 역시도 노트북의 잠금화면 창이 등장하며 어느새 사그라든다. 다시금 열심히 일을 해야할 터였다. 포토샵은 여전히 풀이죽어 있는 듯했다.


 9개월 전 쯤 크몽과 개인 채널을 통해 불가피한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했다. 불가피하다는 표현을 쓴 건 말그대로 불가피해서, 자의로 회사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이때다 캐물어보는 '미필'적 고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예전부터 스스로 인정받는 일을 하는 프리랜서의 삶을 동경해왔지만 막상 등 떠밀리듯 되고 나니 비정기적인 수입에 일거리를 찾는 영업까지 쉬운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고맙게도 크몽과 같은 좋은 플랫폼이 생겨 영업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일거리는 지금보다 더 많아야 함이 분명했으니... 게다가 막무가내식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을 설득하거나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고객에게도 상냥한 가이드를 전달해야만 했다. 물론 뭐 입소문이랄 건 없지만 실제로 클라이언트의 인맥을 타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고 플랫폼에 등록되는 서비스 평가는 들어올 일거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을은 아니지만 을의 기능을 수행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자, 바로 프리랜서였다.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디라 했던가. 이들에게 왕관은 자유였고 그 무게는 '소통'이었다. 손님과 대면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프리랜서의 세계는 더 깊은 의미의 서비스업이었던 것이다. 프로가 되면 나아지려나. 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디자인은 모르지만, 디자인은 합니다."


  나는 13학년도에 대학에 입학해 불어불문학과를 전공했다. 이중 전공이나 복수 전공 없이 불어불문학과 심화 전공을 했으며 대학 생활 동안 연극, 시나리오, 영화 등의 활동에 전념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재밌었으니까. 그렇게 주변에는 미디어 업계를 지망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아직 말할 게 한 가득인 '디자인'은 이때까지도 내 삶의 어느 순간 등장해야하는 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간단히 요약된 23년 남짓의 역사만 봐도 나는 디자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다.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사실 대학생활 하는 4년 동안 뒤에서 몰래 학원을 다녔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을 리 만무했다. 왜냐하면 디자인이란 걸 머릿 속에 넣어본 게 이제야 근 3년 정도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상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내가 어떻게 시계를 든 토끼도 없이 이 이상한 나라의 문을 열 수 있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래서 더 재밌다. 


 디자인 얘기에 앞서 프리랜서로서의 명운을 논한 건 주먹구구 식으로 시작한 디자인 라이프의 오리지널 스토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디자인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무슨 연유로 지금까지도 디자인을 하고 있는가?  흥미로운 건 나는 여전히 디자인을 모르지만 지금도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안일한 소린가 싶겠지만 사실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닌 '체험'의 디자인, '이론'이 아닌 '실행'의 디자인이다. 배우지 않았다 해서 익힐 수 없는 건 아니고 배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자랑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과감히 '아니'를 말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가 뭔데 이런 글을 쓰지'라는 생각을 되뇌일만큼 자랑할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 괜찮은 디자이너라 하기 어렵다. 매번 작업을 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곱씹어 보면 이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시도해온 '부딪혀서 익히는 디자인'이 결코 부끄러운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와 비율'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해서 비와 비율을 적용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를 잘 적용한 작업물들을 잘 뜯어보다 보면 분명 어떠한 원리가 등장하게 되고 이를 통해 비와 비율을 익힐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물론 디자인 대학 혹은 대학원에 갔다면 조금 더 빨리 배우고 익혔을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 통탄하기에는 이 역시도 늦었다. 그렇다면 나아갈 수밖에. 물론 이 일이 내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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