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나를 소개할 때가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낯부끄러움은 참 적응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백수라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나을까 고민을 하곤 한다. 그래도 먹고 사려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백수라는 수식어도 잊지는 않지만.
"저는 요즘 디자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디자이너시구나."
"아뇨. 디자이너까지는 아닌데 디자인을 하기는 합니다."
"굉장히 겸손하시네요."
"아유. 아닙니다. 그냥 백수에요."
물론 겸손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만큼 편치 않은 게 또 있을까 싶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어딘가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었다. 스스로 부끄럽기는 부끄럽나 싶다. 물론 단어에 '-er'만 붙이면 직업이 되는 세상에서 굳이 아니랄 건 없지만 어쨌든 적어도 디자이너는 아닌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가 폭발하는 형형색색의 명함도 없고, 오브젝트만 보면 샘솟는 영감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발붙일 적(籍)이 없다. '직업인'으로서 디자이너라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내가 일하는 회사, 혹은 스스로 만든 디자인 사업체라도 있어야 할텐데 나는 그저 디자인 일로 조금씩 돈을 버는 열혈 백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디자인에 대해 글을 쓰려는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가. 브런치라는 고마운 공간을 통해 '작가'와 '책'의 장벽이 많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디자이너가 아니라 말하는 이가 디자인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게 가당키나한가. 보통 책, 특히나 자기 계발서라 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나 그에 준하는 사람이 경험이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만든 배움의 수단이다. 그렇기에 이를 읽는 독자들은 책으로부터 관념적이든 실무적이든 분명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고 이 계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작가 자체의 위상이다. 글쓴이가 가진 가치와 정보가 완전하지 못하다면 독자들은 이를 금방 알고 달아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와 같은 높은 장벽으로 인해 단절된 시공간이 생겼다. 이제 막 마라톤을 시작해보려는 이들을 위한 페이스메이커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뛰는 연습부터 하라고? 맞는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조깅은 하는데 이는 사실 마라톤하고는 다른 문제다. 하프 마라톤을 함께 뛰며 호흡을 맞춰갈 사람이 그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필요할텐데 말이다.
디자인 라이프를 서술하고자 마음 먹으면서 처음의 나처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이나 유튜브 등 디자인 업계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많지만 대다수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현재를 중심으로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것들이었다. 나에게는 '비전공' 딱지를 달고도 디자인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 내지는 시작점을 찾는 게 필요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멘토없이 주먹구구 식으로 '디자인' 바다를 유영한 지 어느덧 2년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은 마치 항해사조차 없는 배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디자이너'를 가리키는 나침반 하나에 의지해 바람이 불면 하루 종일 나아가고 비가 오면 고민없이 멈춰섰다. 사시사철 나아갈 수 없었던 건 혹여나 암초에 부딪혀 상처가 나지는 않을까, 동력이 떨어져 그만두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저 창작을 즐길 수 있는 나의 크고 견고한 선체에 의지해 흘러가다보니 둘러볼만한 작은 섬 정도에 도착했다. 나름대로 괜찮은 작업물들을 만들고 있구나 하는 정도지만 이제서야 어딘가 도달할 수 있다는 약간의 가능성 정도를 얻은 것만 같다.
지금부터 써내려갈 약 3년 간의 디자인 연대기는 '아는 디자인'이 아닌 '하는 디자인', 다시 말해 작업으로 습득하는 하나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다. 좋아하는 마음이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굉장히 평등한 방법이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공정한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에 의한 주입이 아닌 자의에 따른 탐색. 단기간에 끝날 리 없지만 그만큼 희열이 큰 방법이라고 해두자. 만약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루피 해적단이 보물 '원피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면 무려 20년을 더 지나온 거대한 여정이 고작 몇 년만에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다면 지금의 인기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함께해야 지쳐도 내던지지 않고 질려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