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그리워지는 날, 꺼내보는 글
곧 아빠의 기일이다. 내가 마흔이 되자마자 아빠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서울의 대형병원 두 곳에서 수술도 의미 없고 두세 달 남았다고 했다. 아빠는 예정보다도 더 서둘러서 2주 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어느새 4년이 흘렀다.
아빠는 1998년 말 IMF 위기로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그 뒤로 잠시 사업을 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은 큰 위기를 겪었던 적은 없었다. 아빠가 은행에 다닐 때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감옥에 갈 뻔 했지만 잘 해결되었다. 음주운전을 해서 면허가 정지되었지만 큰 사고는 없었다. 엄마가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다. 우리 4남매를 키우느라 가지고 있던 땅과 돈이 거의 다 사라졌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문제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아빠는 은행에서 나온 뒤로는 늘 불안해했다. 당신만 밀려났다는 패배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식 넷을 낳아서 잘 키웠고 일도 할 만큼 했는데 뭐가 아빠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빠는 거의 매일 술과 함께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나서도 집에만 오면 엄마 앞에서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욕 했다. 술버릇이 고약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던 아빠는 갑자기 주어지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다. 이게 가장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다. 뭐라도 배우거나 좀 쉬지, 왜 오로지 술이었을까?
아빠와 술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겨자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아빠는 술에 취해 들어오면서 연겨자 100g짜리 4개를 사왔다. 우리 4남매 준다고 말이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인사불성인 상태에서도 자식 생각이 났나 보다. 나중에 아빠와 김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빠는 기억도 안 난다면서 멋쩍게 웃었다. 마트에서 연겨자가 보이면 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빠는 맨정신에는 집에서 거의 말도 안 하고 무뚝뚝했다. 술에 취해야 우리들에게 사랑한다면서 안고 볼을 비볐다. 자식이 넷이나 되는데 죄다 엄마만 좋아한다고 서운하다고도 했었다. 취중에 기대어 진담을 전하려던 아빠를 우리는 아빠가 현관에 들어서면 자는 척 하며 피한 적도 많았다. 왜 나는 그리고 우리 4남매는 먼저 아빠한테 다가갈 생각은 안 했을까?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말이다.
아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다른 하나는 40만원이다. 대학 1학년 때였다. 방학을 맞아서 친구와 둘이서 국내 배낭여행을 간다고 돈을 달래러 집에 갔었다. 그때 아빠는 이미 은행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철이 없었던 건지……. 아빠는 가만히 듣고 있더니 한숨을 푸욱 쉬고 집을 나갔다. 여행을 못 가겠구나 포기했는데, 아빠가 몇 시간 후 술에 취해 들어오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40만원이 들어있었다. 도대체 그 돈은 어디서 구해온 것일까?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피땀 흘리며 번 돈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막무가내인 나는 아빠의 피땀눈물로 얼룩진 돈을 펑펑 쓰면서 젊은 날의 추억을 채워 나갔다. 그 40만원은 얼마의 값어치일까? 홀로 남은 엄마한테 갚아야 할 텐데, 다 갚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아빠를 생각하면 우루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큰 병원 두 곳에서 수술도 포기했을 때 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전에 갔었던 내과에 가자고 했다. 소화가 안 돼서 아무 것도 못 먹겠으니까 소화제나 우루사라도 먹겠다고 말이다. 아빠는 의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병원에서 글쎄 돈을 내겠다는데도 수술을 안 해준다고 말이다. 그 의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빠도 이미 끝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답답한 마음을 풀고 기댈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옆에서 아빠한테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 매정하고 몹쓸 딸이었다 나는……. 우리집에 3일 있다가 아빠는 작은 키가 한 뼘은 더 줄고 어깨가 축 처진 채 엄마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주 후 도망치듯 “엄마와 잘 살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약국에서 우루사와 마주치면 나는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아빠가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들어주면 안 되는 거였니? 라고 따져 묻는 것 같다. 어떻게 딸이 아빠를 그렇게 외롭게 보낼 수 있는 거냐고 말이다.
아빠를 생각하면 나는 이렇게 잘못한 것들만 떠오른다. 눈물을 흘리는 걸로 죄를 씻어내려고만 한다. 참 나쁘다.
아빠, 외롭게 보내드려 죄송해요. 그곳에서는 술 말고 다른 취미생활 하면서 여유롭게 잘 지내고 있어요. 우리 다시 만나면 내가 꼭 붙어서 팔짱도 끼고 살가운 딸이 될게. 엄마와 행복하게 잘 살라던 아빠의 마지막 말은 꼭 지킬게. 곧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