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게 어느새 시간이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엄마랑 있을 때 수다를 떠는 쪽은 오영이었다. 하고픈 말도 묻고픈 말도 많아 늘 엄마옆을 따라다니며 조잘거렸던 오영이다. 그런데 지난 세 시간 오영은 그저 끄덕거리거나 꿈벅거리는 것 외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겹지가 않았다.
기억을 잃고 지난 몇 달간 많은 일이 있었다.
몇 년 같은 며칠을 보내고 악몽 같은 몇 주를 보내고 가까스로 적응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여러 상황들이 그저 낯설기만 했다. 두렵고 무서운 낯선 환경에 도망치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동시에 궁금함이 그만큼 커 용기 내어 한걸음 다가설 때마다 엄청난 숙제들과 질문들이 산더미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만나가다 보니 어느새 민영의 앞에 도착했다.
세 시간을 이야기했지만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결혼 스토리까지는 도착하지 못했다. 더 듣고 싶었지만 민영의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통에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민영은 순간 최면에서 깬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화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언뜻 보이는 화면의 이름은 '엄마'라고 적혀있었다. 순간 근처에서 기다린다 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아, 엄마가 기다리시는데 우리 또 만날래요? 또 만나요!!"
순간 또 만나서 놀고 싶단 생각에 민영에게 또 만나자 이야기를 해버렸다. 순간 민영의 표정에 미소가 번지며 "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밌었다. 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숨이 가빠오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얼음물이라도 한 바가지 얼굴에 끼얹고 싶었다.
'내가 아까 뭐라 했더라?'
'민영이 내가 사탕만 먹으면 귀엽게 웃었어. 사탕을 세 봉지 사들고 만나야겠어!'
'사탕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빨이 썩을 텐데, 오도독 소리 나는 연습을 좀 해볼까?'
'사탕 먹는 모습이 좀 멋져 보였나? 담엔 두 개씩 씹어볼까?'
오만생각에 키득거리며 길을 걷다 빙긋 웃으며 바라보는 엄마를 발견한다. 긴 시간 말없이 늦은 것에 화라도 났을까 살짝 걱정되었지만 얼굴을 보니 걱정이 사라진다. 지루하지도 않았는지 전혀 화난 표정이 없었다. 엄마도 분명 친구를 만나 신나게 놀다 온 게 분명했다. 엄마의 맘을 살펴볼 겨를 없이 다시금 민영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그저 오영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도무지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표정은 늘 그랬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고 안심이 된다. 처음 경찰서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랬고 혼자 집에 남겨졌을 때도 엄마의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무서움도 가라앉고 다 괜찮아질 것 만 같았다. 순간 처음 만났을 때의 민영의 표정이 떠올랐다.
거울을 바라보며 엄마의 표정을 흉내 내본다. 살짝 입꼬리도 올려보고 눈을 찡긋거려보기도 하고 코를 힝 소리 내보기도 하며 엄마를 따라 해보는데 도무지 그 표정이 아닌 것 같다.
다음에도 민영이 울 것 같으면 안심되는 엄마의 표정을 연습해 가서 민영을 달래줘야겠다 싶다.
저녁밥을 먹으며 민영이 말해준 습관들을 엄마에게 확인했다.
"엄마, 내가 긴장하면 아몬드사탕을 그렇게 먹어댄대~!"
"엄마, 내가 오늘 두유라떼라는 걸 마셨는데 그거 엄청 고소하고 부드럽고 정말 맛있더라. 우유랑 다른데 엄청 부드럽고 있지. 우유보다 뭔가 더 고소하고 엄청 맛있었어!"
"엄마, 민영인 내가 좀 당황하면 이마를 찡긋한다~ 근데 그리고는 가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막 꺼내줘. 엄청 신기하지!!"
한참을 조잘거리니 엄마도 시끄러웠는지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잠시 멈춘다. 순간 멈칫해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는 잠시 젖은 손을 마른 수건에 닦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특유의 알 수 없지만 안심되는 표정으로 볼을 살짝 꼬집더니 눈을 찡긋거린다. 마음이 또 따뜻해진다.
불안했던 아침과는 달리 좋은 사람과 재밌는 시간도 갖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사랑하는 엄마까지 옆에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