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군 Aug 26. 2021

비극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연극 <추락 1>

재현/비재현 너머, ‘비극의 형식’에 대하여 : <추락 1>



"우리의 모토는 연극을 어떻게 하면 오락적이고 동시에 교훈적일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신적인 마약거래로부터 벗어나, 환상의 장소를 경험의 장소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베를톨트 브레히트



재현하지 않는 비극


“비극은 재현될 수 있는가?” 이른바 ‘재현의 윤리’는 사회적 비극과 예술 사이의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아우슈비츠 이후 모든 서정시는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한 아도르노부터 "'재현의 포기’, 혹은 '재현할 수 없음의 단호한 주장’을 통해서만 재현의 불가능성이 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 리오타르. 그런가 하면 반대로, “재현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선택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랑시에르를 이어 문학, 연극, 영화 등 각각의 분야에서 각자의 답을 대놓고 있는 동시대 예술가들까지. 저마다 내린 결론은 모두 다르지만,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다소 거칠게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하고 모순된, 차마 형상화하는 것조차 주저되는 현실의 수많은 비극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애도하고 위로하고 일깨우며 목소리낼 것인가?” 이 복잡하고 무거운 질문에 <추락 1>은 어떻게 답하는가.

2018년 7월, 포항 해병대 1사단에서 헬기 추락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사고로 사촌오빠를 잃은 유족이자 당사자인 연극인 박화란의 자문화기술지를 바탕으로 서술한 이 작품은 형식적 측면에서 보면 ‘서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어떤 사건에 휘말리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행하는 행동들을 따라가는 것이 서사에 대한 고전적 인식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전개가 이 연극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겪고 보고 느낀 일들에 대해 ‘증언’하는 이만 있을 뿐이다. 서사가 없다는 말은 곧 재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공된 인물과 배경을 통한 극적 상황을 꾸미지 않고 당사자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추락 1>은 동시대 한국 연극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버베이팀 연극’으로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혹은 ‘문자 그대로’를 뜻하는 버베이팀은 공식 기록, 신문 기사 등의 자료와 인터뷰, 취재를 통해 드라마를 구성하는 다큐멘터리 연극의 한 방식이다. 재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자리를 당사자의 목소리로 채우는 것. 이것이 <추락 1>의 가장 핵심적인 선택이자 태도다.



비극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공연이 시작할 때까지, 이 태도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이 사건을 겪어 오며 느낀 것들을 연극으로 풀어낸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터뷰에서 대본으로, 당사자에서 연기자로, 그리고 현장에서 소극장으로 단순히 바톤을 넘겨받은 것 뿐이라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작품이 재현을 배제하고 증언과 인터뷰에 기반을 둔다 하더라도, 연극의 역할은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믿는다. 불의의 사고로 사촌 오빠를 잃은 한 배우의 증언은 흡인력 있고 호소력 짙었으며 때때로 관객을 울게도 만들었지만, 그것만이 연극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연극이 관객에게 어떤 슬픔을 준다면, 그리고 그 슬픔이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유가족의 인터뷰나 사고에 대한 기사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슬픔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또 다시 질문, 슬픔에 유의미함의 잣대를 내세우는 것은 옳은가? 어떤 눈물은 최루적이고 어떤 눈물은 그렇지 않은가? 이 질문은 우선 유보해두고-


우리는 종종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함정에 빠진다. 소수자 문제, 사회적 비극… 작품을 둘러싼 맥락, 즉 컨텍스트가 의미있다면, 텍스트 자체의 의미도 함께 채워진다는 다소 허술한 믿음.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비극은 재현될 수 있는가?” 작가/연출가는 재현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이 질문을 우회했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남아 있다. “연극이 연극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비극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형철 평론가는 한 지면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끝끝내 시는 사라지고 만다.” 한 사건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예술(연극)이 아닌 다른 방법이 많을 것이다. 단순히 주장하고 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작품은 예술인 동시에 프로파간다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와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작품의 전부라면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여러 다른 가치들을 포기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둘 것


그런 의미에서 <추락 1>이 극을 이끌어가는 한 명의 화자와 더불어 ‘모겔론스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함께 등장시킨 선택은 살펴볼 만하다.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는 한 명뿐이며, 1인극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증언자)는 두 사람이다. 헬기 추락사고의 희생자 유족인 ‘화란’과 멜버른에 거주하며 모겔론스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 멜버른의 여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화면에 나타나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한다. 골자는 이렇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정체불명의 피부병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지만 의사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모겔론스 병은 2000년대 초 의학계의 큰 논쟁거리였던 병으로, 환자에게는 피부 밑을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편함과 고통을 느끼지만 의학적으로는 밝혀진 바가 없어 많은 어려움을 낳았던 병이다(현재도 그 실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검증된 연구가 없다). 자신과 희생자의 유족들이 겪은 아픔에 대해 말하다가도 화란은 종종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의 말을 듣는다. 때로는 먼저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많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가족들은 어떻느냐고. 작은 텔레비전 화면 속 그녀를 바라보며 화란은 그녀가 나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해받을 수 없는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질수록 깊어지고, 그 진솔함의 깊이만큼 단단해진다.


프로젝터를 통해 상영되는 환자의 인터뷰 영상은 초반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지만, 연극이 진행될 수록 관객은 이 이야기가 두 사람의 대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구성은 사건을 겪은 당사자가 그 기억에 대해 구술하는, 단면적인 차원을 넘어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갑작스러운 참사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은 존재조차 불투명한 난치병을 앓는 일과 비슷하다고. 상실의 슬픔과 모겔론스 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진단할 수도, 처방할 수도 없지만), 정확하게 실재하는 고통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이러한 구성은 이해받을 수 없는 수많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며 설득력을 얻는다.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늘어간다는 점, 그리고 그 슬픔은 갈수록 스스로를 갉아먹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한 상처를 공유한 존재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추락 1>은 단호하게 말한다. 쉽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둘 것. 그러나 그것을 포기라고 불러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의 준비단계이자, 일말의 가능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 슬픔과 함께 있을 것.


“당신이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참사와 난치병, 서울과 멜버른의 거리만큼 아득히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프로젝터 너머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마지막 대사는 ‘연극적’이다. 이 순간 연극은 당사자의 증언을 넘어 하나의 결론으로 도약한다. 혼자가 아니었으며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거라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병을 앓는 환자에게, 관객에게 건네는 데 성공한다.



비극의 형식에 대하여


비극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각각의 작품이 이 질문에 저마다의 결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놓을 것이다. <추락 1>을 통해 내가 얻게 된 결론은, 비극은 ‘함께 슬프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함께 슬프다고 해서 그 슬픔이 옅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비극이 슬픔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슬픔의 한가운데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 결론이 너무 감상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느냐고 되묻고 싶다. 무엇보다 우리는 ‘슬픔’에 대해,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방법론과 창작론, 형식에 대한 논의와 실험 속에서 비극의 당사자(피해자)들과 함께 슬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 재현/비재현의 논쟁도, 버베이팀도 모두 그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답은 애도와 분노, 책임에 걸맞는 ‘비극의 형식’을 찾아내려는 노력 끝에 조금씩 주어질 것이다. 예술가는, 작품은 함께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기어이 관객을 그 슬픔으로 물들여, 한 번 흘려낸 뒤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눈물이 아닌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한 줌의 진실을 손에 쥔 채로 극장을 나서게 만들 수 있는가. 슬픔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구태여 슬픔을 새롭게 빚어내고 또 찾는 우리는 함께 슬플 수 있는가.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말할 때, 그 외침이 공허한 울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끝>

작가의 이전글 살면서 서른 번 만날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