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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니 Mar 16. 2019

제주 올레길에서의 단상

티격태격 변호사 가족의 일상 14

작년 여름 제주 함덕 서우봉 둘레길에서 있었던 이야기.


우리 부부는 여행 스타일이 다르다. 나는 최대한 많이 나다니는 걸 선호하고, 남편은 숙소에서 느긋하게 쉬는 걸 선호한다. 아빠를 똑 닮은 아들도 숙소 침대에서 뒹굴며 티브이 시청하는 게 제일 좋단다. 그러려면 왜 비싼 교통비를 내고 이 먼 곳까지 오냐는 나의 타박에, 숙소에 조금이라도 오래 있어야 숙소비가 아깝지 않다는 항변을 하는 남편이다.


십 년 이상을 함께 살다 보니 내가 좋은 걸 상대방이 똑같이 좋아할 수는 없다는 진실을 깨우치고, 이제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곤 한다. 호텔 조식이 아까워서 자는 남편을 깨워봤자 하루 종일 뿌루퉁한 얼굴을 대하며 여행을 망치기 십상이니, 굳이 굳이 늦잠을 깨우지 않고 나 혼자 가서 느긋하게 조식을 즐긴다던지!

 

그날도 남편은 늦잠 삼매경이었고, 아이들은 티브이 만화 삼매경. 날씨는 너무나 화창하고 객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도 너무나 청청했다. 아침도 다 먹었고 나갈 준비도 다했는데 남편은 열 시가 되어도 일어날 기미가 없다. 좋아. 나 혼자라도 갈 테야! 아이들에게 아빠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해놓고 혼자 나왔다.


해변길을 지나 함덕 서우봉에 올랐다. 사진과 같은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역시 혼자라도 나오길 잘했다! 곧 산 정상 쪽으로 향하는 듯한 시멘트길과, 산둘레로 돌아가는 올레길이 나뉘었다. 그런데 저만치 보니 올레길은 공사로 중간에 끊겨있었다. 좋은 경치에 들뜬 데다가 일종의 반항심으로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보리라 결심한 나는, 쓸데없이 힘들고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멘트길을 택했다.

 

생각보다 길은 경사졌고, 올라갈수록 어두침침한 숲길이었다. 사람도 없었다. 몇 년 전인가 혼자 올레길을 걷다 살해당했다던 여성 관광객 이야기도 떠올랐다. 무서움을 달래려고 스마트폰 라디오 앱을 켜서 음악까지 틀었다.


그쯤 되돌아왔어야 했는데... 그 날은 아예 길을 헤매려고 작정을 했었던가보다. 산을 넘어가면 택시라도 탈 수 있겠지 뭐. 안일하게 생각했다.


결국 산등성이를 넘었다. 그런데 산 반대편으로 넘어가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너무 조용한 어촌마을이 나왔다. 택시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거다. 아. 울고 싶어라. 다리는 너무 아파서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는 최후의 수단이 남아 있었는데 어쩐지 그 아침의 반항심 때문이었는지 그러기가 싫었다. 할 수 없지. 방법은 하나뿐이다. 온 길을 똑같이 되돌아 가는 것. 다시 산을 넘어 가자.


아픈 다리를 끌고 서우봉을 두 번 넘으면서 결심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자고. 돌아올 때 너무 힘들다고.


사실 남편이 얼마 전 지방근무를  시작해서 주말부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일을 그만두고 남편이 있는 지방으로 다 같이 내려갈까 계속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러려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거래처, 경력을 대부분 포기하고 가야 했다.


그 날 숙소로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나의 자리를 지켜야겠어. 너무 멀리 갔다 돌아오려면 힘들 것 같아.


남편은 벙벙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했다. 남편은 사실 내가 나간 직후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럼 전화하지 왜 안했냐고 하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라고 그랬단다.


만일 그 날 남편이 일찍 일어났더라면? 내가 길을 헤맬 때 전화해서 데리러 왔더라면? 지금쯤 여유 있는 지방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을까? 어쨌든 난 아직도 독박 육아를 담당하며 업무에 집안일에 육아에 치여 살고 있다. 여자는 왜 살아가는 거냐며, 이 이중의 굴레는 뭐냐며 사십춘기를 앓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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