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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NJ Jul 26. 2022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 사라지는 아이들의 공간

https://forms.gle/MwRhrzeTc3jd56Sx9 


 자기 몸만 한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도서관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옵니다. 저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씩 집어 들고 널찍한 책상 주변에 모여 앉아,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읽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들어온 아이는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직접 대출 명부를 작성합니다. 봉사자들이 관리하는 서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1층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곳을 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20년이 넘도록 지역 아동들과 주민들의 공간이었던 설문대 도서관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2022년 5월. 도서관 봉사자들은 청청벽력 같은 소식을 제주시로부터 전해받습니다. '공유 재산'인 경로당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원상 복구하고 나가 달라는 통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이 어떻게 한순간에 무단 점유 시설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작은 빌라 지하에서 운영되던 도서관은 제주시 연동 사무소 동장의 소개와 연동 노인회장의 동의를 얻어 2000년, 연동 경로당 2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지방 정부가 대화를 통해 이룬 자발적인 연대, 이런 배려와 존중 속에서 아이들의 도서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의 배려로 도서관이 첫 발을 뗄 수 있었고, 현재 등록 회원만 8,000명이 넘는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과 도서관은 20대 청년이 되었고,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들은 이곳의 지킴이이자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20년 전 이곳의 어르신들은 단순히 공간을 잘라 내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 곳이 없는, 지하에서 책을 읽던 아이들을 자신들의 품속에 품어주기로 하신 겁니다. 이런 배려 속에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가 태어났습니다. 풀뿌리 민주주의. 아이들은 이런 가치를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끼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어른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어른들이 일궈온 땅에 무단점유 표지판이 꼽혔습니다. 지자체와 민간이 협력해서 만든 어린이들의 공간에 새로운 유형의 어른... 아니, 어른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도서관 한편에는 봉사자들이 어르신들과 함께 만든 그림책이 가지런히 꼽혀 있습니다. 개발로 인해 철거된 집, 사라진 놀이터, 오염되지 않은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던 어르신들. 그들의 그림과 글에는 지난 시절에 대한 애정 어린 추억이 묻어있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조금씩 과거의 향수에 물들어 살아가죠.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의 추억, 도서관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아이들의 손떼가 묻은 물건들. 추억을 잃어본 어른들이, 언젠가 추억으로 남을 아이들의 공간을 무너뜨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설문대 도서관은 국무총리, 문화관광부, 여성 가족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바람직한 지역 공동체라는 사실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조언과 자문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곳의 시민들은 정부와 협력하여 민주 시민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어른,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 술집, 음식점으로 넘치는 제주시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두발로 이곳저곳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한집 걸러 카페, 술집, 치킨집이 넘치는 세상에서 몇 안되는 어린이 도서관을 없애려는 정당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절차적 적법성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인해 모두가 피해를 본다면 이는 탁상공론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서관에 통보 없이 관련 기관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유예기간을 충분히 제공했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영토를 임의로 갈라먹기 하던 역사가 평화의 섬 제주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퇴거를 통보한 부서 담당자는 정작 이곳에 단 한 번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후시대에 세계 시민들의 후원을 받고 성장했던 대한민국은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단체를 통해 전 세계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성숙한 대한민국에 여전히 길 건너 이웃집도 돌아보지 않으려는 어른, 아니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안 없이 밀어붙이는 2022년의 퇴거 명령은 1970~1980년대 서울에서 이루어진 강제 철거와 도시 난민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민들을 배려한 어떤 대안도 없이 도시를 멸균하겠다는, 인권과 상호 신뢰를 짓밟는 정책과 시도. 지역을 넘어 전국, 해외까지 알려진 제주시민들의 업적과 노고는, 앞으로 반민주적인 정책 집행 사례로 퍼져나갈지도 모릅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어린이 도서관 중 하나인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 평화의 도시를 자청하고 상생과 협력을 이루겠다는 방향에 역행하려는 시도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경로당 2층 건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삐뚤 빼뚤한 글자로 가득한 도서관 대출 명부. 어떤 이는 이런 도서관을 두고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았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아이들은 이곳에서 질서와 자율성이 무엇인지, 어른들의 헌신과 배려가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이곳을 없애려는 시도가 성공한다면, 아이들은 불통(不通)과 무례함이 세상을 살아가는 정도(正道)라 배울지도 모르겠네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행동을 답습해왔습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힘쓰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06031


http://www.jejuilbo.net/news/articleView.html?idxno=187679


http://www.jibs.co.kr/news/replay/viewNewsReplayDetail/2022071819231612386?feed=na


https://www.sentv.co.kr/news/view/625544


http://www.jejumaeil.net/news/articleView.html?idxno=317403


http://www.headlinejeju.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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