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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키우는 사회

도서관에서 무엇이 자라는가?

by R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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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png 장리석, 바다의 역군. 제주도립미술관 소장


제주의 다양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고 장리석 화백. 고갱이 타히티의 여인들을 그렸듯이, 장리석 화백은 제주의 여인들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해안가에 모여 밥을 먹고, 젖을 물리고, 햇볕 아래 머리를 말리고. 굳세기로 유명한 제주 여인들의 당찬 모습과 여인들의 품에 안긴 아이들. '아이는 마을이 함께 키운다.'라는 격언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멋진 그림입니다. 얼마 전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사라지는 전통이 되어버린 이웃사촌이라는 관계를 유쾌하게, 한편으론 애절하게 그려냈습니다. 우리는 연기자들의 미소와 눈물을 보며 자연스레 감정이 공명하는 체험을 하며 보편적 동질감을 공유하곤 합니다.


"책이 종종 없어져도 그러려니 해요. 책을 시집보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 강영미 관장님은 따듯한 커피를 한 잔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집보낸다. 책은 꼭 이곳에 담겨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어디에서든 제 역할을 해낼 것이다. 철새가 그러하듯, 연어가 그러하듯, 돌아올 이들은 언제가 제 때를 맞춰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봉사자들은 책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책을 들고 올 아이들, 언젠가 다시 찾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고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엄선한 책을 서고에 꽂고, 아이들의 작품을 벽에 붙이고,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합니다. 처음 도서관을 찾았을 때, 관장님이 누구인지 묻는 저의 질문에 강영미 관장님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직함이 없어요. 형식적으로 있죠. 저를 포함한 안방마님 세명이 같이 도서관을 관리하고 봉사자들이 꾸준히 도와줘요."


수평식, 그리고 자매식 조직 운영.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입니다. 모든 도서관 이용자들이 직, 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8개에 이르며, 300여 명의 가족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프로그램은 누가 시켜서, 새로운 정책과 정치인의 영향 아래에서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이런 의견들이 모여 새로운 프로그램이 만들어집니다. 어르신들의 추억을 담은 그림일기를 함께 만들고, 어린이 도서관 건립과 어린이 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하며 도움이 필요한 장소를 언제나 먼저 찾았습니다.


"이전부터 꾸준히 해왔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다른 거는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이 추억이 깃든 장소에서, 해왔던 일들을 계속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들은 시간이 흘러 이곳의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아이들의 이모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부모들을 위한 교육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변화하는 역할과 관계 속에서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먼저 이 길을 걸어본 이들이 자신만의 노하우를 나누는 곳.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은 모두가 선생이 되고, 모두가 학생이 되어 가르치며 성장하는 학교였습니다.


KakaoTalk_20220727_141427303.jpg 현무암 지붕과 백년초


도서관이 위치한 경로당 2층 발코니에서 관장님과 아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발코니에선 현무암으로 덮인 넓은 지붕이 내려다보이는데, 돌 틈 사이에서 커다란 백년초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마, 화분에 놓고 키우던 백년초에서 열매 하나가 떨어져 지붕으로 데굴데굴 굴러갔을 겁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그 백년초 한그루가 살아남아 한그루의 성체(成體)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저 백년초를 보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듣고 관장님은 말없이 웃으셨습니다. 누가 손으로 옮겨 심지 않아도, 삽으로 땅을 파헤치지 않아도 마치 제 자리인 것 마냥 자리를 잡고 자라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전 세대가 가꾸어 놓은 담벼락을 넘어서며 성장합니다. 헤세가 말했듯, 누구나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렇게 한 아이가 어른이 됩니다. 이리저리 구르다 제 뿌리를 내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죠. 이런 여정에 하나하나 누군가의 손길이 닿게 된다면, 번데기는 속부터 곪을 것이고, 뿌리는 스스로 뻗어나갈 힘을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만히 바라볼지, 무엇에 손을 대야 할지 보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절대적 정의는 절대적 불의에 가깝다.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에 나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영역에 줄자를 들이민다면 그 누가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작은 도서관 진흥법 제9조에 '(국유ㆍ공유 재산의 무상 대부 등)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도서관법」 제31조 제1항에 따라 등록한 사립 작은 도서관의 조성 및 운영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국유재산법」 또는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등의 관계 규정에도 불구하고 국유ㆍ공유 재산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하거나 대부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자체가 도서관을 몰아낼 수 있는 권한과 도서관의 존립을 허가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두 가지 도구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도서관 이용자, 봉사자, 도의원, 기자 등 다양한 지역 주민들이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을 위한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작은 노력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남기는 이 기록은 도서관이 헤어지고, 흩어지는, 또는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가 실패라고 여길 결과라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하나의 경험으로 전달되고 새롭게 활용되길 바랄 뿐입니다.


절박함, 결핍을 경험한 이들은 언제나 고난의 순간을 글로 남긴다고 합니다. 참호의 기록, 서대문 형무소의 흔적, 팔만 대장경과 난중일기. 쉽사리 유전되지 않은 인간의 용기는, 책과 글로 남아 후대로 이어집니다. 용기있게 행동하는 시민 사회의 목소리가 보다 멀리, 오랜 시간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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