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살아서 제주도를 그렸다. 이젠 아빠가 되어 아이와 엄마를 그린다.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목탄을 주문했다. 펜촉으로 그리는 그림이 조금씩 질리기 시작했고 일상의 풍경이 조금 바뀌었기에 새로운 재료가 필요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좋든 싫든 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섬 이곳저곳을 홀씨처럼 날아다녔던 소중한 시간은 어느새 까마득한 추억이 되어 멀어져 버렸고, 이젠 동네 공원 한번 나가기가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당연하게도 아빠의 풍경은 아이와 엄마가 되었고, 엄마의 풍경은 허둥대는 아빠와 울어재끼는 아이, 아이의 풍경은 턱살이 접힌 거대한 동물 두 마리(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가 아닐까. 대부분의 시간을 한 몸이 되어 보내는 모자를 바라보니 나무가 떠올랐다. 우리는 굼뜨게 자라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까맣게 태운 나무로 나무가 된 엄마와 아이를 그렸다. 젖을 먹는 아이는 기생하는 버섯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랑의 산물인 열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는 아직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나도 낯선 재료가 손에 잘 맞지 않았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어른과 30일이 갓 지난 아이는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우리는 함께 자랄 것이다. 목을 힘차게 들어 올리고(요새 터미 타임을 하느라 아기가 정신이 없다) 손을 쉼 없이 놀리다 보면 나름의 돌파구를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아이의 삶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애기 엄마는 두 남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엄마가 되어간다.
두 번의 전시회가 끝났고 신생아는 영아가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변명도 안 통하는 1년 차 경력직이다. 그림을 그리고 육아를 하며 부족함은 결함이 아니라 불균형한 성장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아래쪽 가지를 하나씩 쳐냈고, 이제 하늘로 뻗어나갈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