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감에 있어서 조금씩 잊히고 낯설어지는 말이 있다. 조부모님이 모두 떠나버린, 나 같은 경우에는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말을 쓸 일이 없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대할 때에도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는 일이 더욱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어 버렸으니. 존재가 사라지니 자연스레 말도 사라져 버렸다. 며칠 전,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을 알려주려고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스스로의 발음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말에도 먼지가 낀다.
늙어가는 부모와는 반대로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새로운 단어가 끊임없이 생겨난다. 아이가 알고 있는 단어가 대략 스무 가지는 될 것 같은데, 이제 아이는 주어진 단어를 조합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안아줘, 아빠!".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가 처음으로 만든 문장이다. 나는 이 짧은 문장,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제 맘대로 뛰노는 우스운 억양과 단어를 잇기 위해 배에 힘을 꾹 주는 아이의 표정까지.
매일매일, 새로운 말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는 20개월 아이에게도 잊히고 사라질 뻔한 단어가 있다. 바로 "짹짹"이다.
짹짹
20g 남짓한 성체 제비는 약 10,000km를 비행했다가 봄과 함께 돌아온다. 비행기를 타도 족히 12시간은 걸리는 장거리 비행을 마친 후, 제비는 신기하게도 자신이 태어났던 둥지를 찾아온다. 새끼들이 태어나고 다시 떠나기까지, 제비 가족이 둥지 속에 머무르는 시간은 약 3주 정도에 불과하다. 한 달 남짓한 세월이면 새끼는 독립하고 부모 제비는 육아에서 해방이다. 비록 인간에 비하여 몹시 짧으나 가까이서 보았을 때 그 과정이 결코 수월해 보이지는 않았다.
제비는 하루에 300번 이상 먹이를 잡아야 한다고 한다(하루 3번 밥 제때 먹이는 일도 고역인데!). 우리 집 주변 둥지에는 평균적으로 4~5 마리 정도의 제비 새끼들이 살고 있는데 부모는 정말 쉴 새 없이 둥지와 길가를 오가며 먹이를 실어 나른다. 다리가 약한 제비는 땅에 내려앉기가 쉽지 않아 주로 날벌레를 사냥하는데, 최대 속도가 약 250km/h에 이른다고 한다. 불꽃같은 반나절을 보낸 탓인지 해가 지면 부부 제비가 둥지 가생이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곤 했다. 센서등이 환히 켜져도 미동이 없다.
우리 가족은 제비가 알을 낳고 새끼가 태어나는 순간을 옆에서 지켜봐 왔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새라 아이가 가장 가까이에서 본 새도 제비였고, 어린이집 출근을 하는 길엔 제비집에 손을 흔들며 "짹짹" 소리를 흉내 내곤 했다. 조금 자란 새끼 제비는 인디언 보조개를 닮은 하얀색 털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며칠만 지나면 부모와 덩치가 꽤 비슷해져 같이 앉아있으면 부모와 자식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제 날아오른 때가 된 것이다.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던 어느 날, 현관문을 나서는데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비집을 누군가 산산이 뜯어내 버렸다. 아파트를 관리하는 한 청소업체가 10개에 가까운 제비집을 하루아침에 모두 뜯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떤 둥지는 일찍이 이소를 시작했지만, 아이와 함께 손을 흔들던, 현관문 앞의 둥지 속 새끼들은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둥지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제비 한 마리가 벽에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제비는 길을 잃었고 아이는 한동안 "짹짹"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존재가 사라졌고 아이의 말도 사라졌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신나게 손을 흔들던, "짹짹"거리던 아이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