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의 계절이 돌아왔다. 아이는 졸참나무의 열매로 보이는 도토리 3개를 다람쥐처럼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카시트에 앉아 도토리를 조물 조물거렸다.
"도톨! 토톨!"
"동구리(どんぐり)!"
아이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도토리를 처음 보았다. 주인공 메이가 토토로를 쫓아갈 때 토토로는 어렵사리 모은 도토리를 땅바닥에 와르르 쏟고 마는데 아이는 열 번도 넘게 본 장면에서 깔깔, 매번 똑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토토로가 흘리고 다니는 귀여운 열매가 '도토리'임을 알려주었지만 2음절이 최대인 아이는 "도톨"이라 발음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다녀온 늦은 오후, 아이를 차에 태워 인근의 한 수목원에 들렸다. 한 5분쯤 걸었을까, 예상대로 참나무 아래는 온통 도토리 천지였다. 우리는 모자를 벗지 않은, 모양 예쁜 도토리를 찾느라 다리를 쪼그린 채 한참을 돌아다녔다. 누가 수렵채집인의 후예 아니랄까 봐! 요즘따라 아이는 땅에서 무언가 줍는 족족 주머니에 쏙쏙 넣어버린다. 집에 돌아오면 주머니에서 솔방울과 조약돌을 꺼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도톨, 토톨!"
아! 어제 주워온 도토리를 달라는 뜻이구나. 새로운 단어를 금세 익힌 아이가 기특하기 그지없어 헐레벌떡 도토리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도토리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태블릿을 가리키며 구슬프게 외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순간, 뇌리를 톡 우습게 건드리고 사라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두 번째 말은 도톨이 아니라 "토"톨 이었다.
"도톨! 토톨!(도토리 좋아하는 토토로 보여줘!)"
그놈의 영상, 미디어! 나와 아내는 애써 지브리의 영상미와 스토리의 우수성을 근거로 영상 시청의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다. 미디어 시대에 태어난 아이에게 종이 매체만을 강요할 필요도 없겠다만, 영상 시청에 할애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은 비단 우리 부부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다. 고민 끝에 <이웃집 토토로> 도서를 구매했고, 하루에 2~3번씩 목이 쉴 정도로 토토로를 읽어주고 있다. 부작용으로 시간도 잃고 목소리도 잃어버렸다.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담기듯, 아이가 사용하는 단어에도 여려가지 뜻이 담기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욕구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아이는 부모의 뚱한 표정에서 오류의 발생을 기똥차게 알아차리고 우렁찬 울음으로 응수를 해버린다. 도톨, 아이는 이 단어를 통해 도토리 귀신 토토로를 보고 싶다는 욕구를 표현한다. 단어에 새겨진 인상은 쉬이 벗겨질 수가 없기에 나는 새로운 추억을 단어 위에 입혀보기로 하였다.
<이웃집 토토로>의 메이와 사츠키가 그러하였듯, 화분을 하나 장만하여 아이와 함께 도토리를 흙 속에 심어보았다.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흙을 파고 직접 화분에 물을 부었다. 매일 아침 컵에 얼음을 넣고 커피를 내리고 화분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이제 아이는 "도톨"이라 외치며 태블릿이 아닌 화분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