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해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 -
나는 마흔둘,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비혼주의도, 비출산주의도 아니었다.
다만 인생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 것뿐이었다. 결혼도, 출산도 그랬다.
때가 되면 인연은 오겠지.
아니면 혼자 살아도 괜찮아.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받아들임’을 배웠다.
자연스레 출산도 기대했지만,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시험관을 졸업하고
아이를 품는 것이었지만, 두 번의 유산과 반복되는 실패는 나를 지치게 했다. 그 어두운 터널 속에서 나를 더 이상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주사와 고통을 스스로에게 주는 일을
이제는 멈추고 싶었다. 나를 지키고 싶었다.
남편은 보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 그의 나이 마흔여섯.
지금 성공한다 해도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케어할 수 있을까?
출산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시험관 과정에서 내 몸은 점점 상해 갔다.
국가 지원도 끝났고, 반복되는 채취와 실패의 과정은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했다.
자녀 없이 둘이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곧 여러 장점이 떠올랐다.
경제적 여유, 시간적 여유, 자유로운 일상. 아이가 없는 대신 나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고, 남편과의 일상도 조금 더 여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노년에 외로움이 클 수도 있고, 부모로서의 성장을 경험하지 못하는 건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병원을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생리가 시작되어도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더 이상 병원 일정에 맞춰 내 삶을 조율하지 않기로 했다. 그간 시술을 반복하며 50kg 남짓이던 몸무게는 60kg을 넘어섰고, 호르몬 변화로 목에 쥐젖이 가득 생겼다. 하루 네 시간 근무하던 시간제 일마저 그만두고, 병원 일정에만 맞춰 살았다.
그렇게 내 삶은 오롯이 시험관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달라지고 싶었다. 살부터 빼고, 내 삶을 다시 바로 세우고 싶었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며 나를 되찾아가기로 했다.
시험관을 하다 보면 언제까지 시도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번 연도까지만 해요", "남편과 올해까지만 하기로 했어요"라고 말하지만, 해가 바뀌고 생리가 시작되면 또다시 병원을 찾는다.
그만큼 ‘포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단톡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기할 용기가 없어서 계속해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시험관시술은 계속하는 것보다,
멈추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 역시 기도를 바꾸었다.
“성공하게 해주세요”에서
“이제는 나의 삶을 살 용기를 주세요”로.
병원에 가지 않은 지 3개월, 내 삶은 놀라울 만큼 평화로워졌다. 너무도 온화했다.
포기를 결심한 순간, 마음 한구석이 시원하게 뚫린 것 같았다. 동시에 허무함이 몰려왔다. 몇 년 동안 붙들고 있던 무게를 내려놓으니 몸은 가벼워졌는데,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허함이 따라왔다. 그런데 그 공허함이 오히려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아이 생각 대신 ‘오늘을 어떻게 행복하게 채울까?’를 묻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운동을 하고, 장을 봐서 저녁을 준비했다.
남편은 저녁식사 후 유튜브를 보거나 운동을 나갔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을 되찾았다.
주말엔 연애 때처럼 맛집과 카페를 돌았다.
바다뷰를 보며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기도 했다.
때로는 늦잠을 자거나 각자 약속을 나가기도 했다.
가끔은 공연과 콘서트를 보며 마음의 허기를 채웠다.
일상의 활기를 위해 이벤트도 만들었다.
‘다이어트의 달’을 정해 서로를 독려했고,
함께 광안대교 마라톤에 도전하기도 했다.
저녁마다 공원을 뛰며 땀을 흘렸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미용실에 가지 않은 지 오래였고, 새치 염색도 한참 미뤄둔 채였다. 커다란 가방에는 늘 주사기가 들어 있었고, 발에는 언제나 같은 운동화만 신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돌보지 않은 채, 오직 한곳만 향해 달려왔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웠던 걸까?
42살까지는 많은 인맥 속에 살았다. 모임과 관계가 늘 즐거웠다. 그런데 오히려 둘이 살면서부터 다른관계는 줄어들고 남편과 베프가 되었다.
사는 방식이 달라 공감대가 줄어든 걸까?
미혼때는 잘 만나던 지인들이 조금씩 멀어지고 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을테고...
다만 둘이 살기로 한 이후의 삶이
꽤 평화로웠던 건 분명하다.
시험관 스트레스가 사라진 일시적 현상일수도 있지만.
평온한 일상 속에서 가끔은 마음속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는 허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허함과 함께 조용히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