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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시험관을 멈추기로 했다

포기는 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by 찐스마일

결혼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의 난임 시기와 코로나19 시기는 거의 맞물려 있다. 그래서 더 혼자여야 했고, 사색할 시간이 많았고,

삶을 돌아볼 시간도 많았다.


직장도 시간제 일자리로 돌렸고, 타지역 병원을 다니며 결국은 퇴사까지 했다. 그렇게 보면 나는 개인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몸은 한가했는지 몰라도, 마음은 늘 바빴다. 그래서 한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결혼 후 겨우 몇년이 지났을 뿐인데 내 삶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고, 그 안은 많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미혼 시절의 나와 비교하면,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그것은 분명히 수많은 경험이 내게 준 댓가일 것이다.


시험관을 하며 매 순간이 위기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위기를 꼽자면, ‘내 몸의 변화’였다.

50kg 안팎이던 몸무게는 최대 62kg까지 늘었다.

물론 만 40세 이후의 ‘나잇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장기 시술자들이 겪는 몸무게 증가 현상을 보면, 단순한 나잇살은 아닌 듯하다.


나는 체질적으로 마른 편이다. 아버지 유전자 덕분인지 우리 형제들 모두 그렇다. 그런 나조차 살이 끊임없이 쪘다. 호르몬 덕인지, 이식 후 너무 누워만 있고 잘 먹은 탓인지는 모르겠다.


몸에 검은 점처럼 뭔가가 생겨 병원에 갔더니 ‘쥐젖’이라 했다. 임산부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며,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한 번의 큰 위기는 ‘과배란 시술’ 후 찾아왔다.

나는 난소기능저하(난저)라 늘 저자극 요법으로 진행했다. 주사도 적게, 약도 최소한으로, 자연배란에 의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모 병원에서는 저자극을 부정적으로 봤다.


“저자극으로 하실 거면 시험관을 왜 하시나요? 자연임신에 기대는 게 낫죠.”


의사의 말에 흔들렸고, 나도 다양한 시술법을 시도해 보는 게 좋겠다 싶어 과배란에 동의했다.

그런데 약과 주사의 양이 너무 많아 하루 종일 시간 맞춰 약을 챙기느라 극심한 부담이 생겼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려는데 배가 쥐어짜듯 아팠다.
‘과배란이라 그런가 보다’ 하며 참으려 했지만, 새벽녘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남편을 깨워 "너무 아파"라고 말하니, 일단 타이레놀이라도 먹자며 권했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야말로 기어서 다닌다는 말이 어떤 건지 온몸으로 실감했다.

겨우 남편을 다시 깨워 병원에 가자고 했고, 새벽 7시쯤 난임병원에 도착했다. 긴급 초음파를 보던 의사는 말했다.


“난소나 자궁 문제 같진 않네요. 약물 반응도 거의 없어요. 과배란이 아닌데요? 과배란 통증은 아닙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내과로 가보라는 소견을 받고 집 근처 병원에 갔더니, 진단은 요로결석이었다.

“이렇게 아팠을 텐데 밤새 참으셨어요?

비뇨기과 있는 병원으로 옮기셔야 해요.”


진통제를 맞고, 오후에 종합병원 비뇨기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시험관은 이번이 처음인가요?

아뇨. n차입니다.

음~고생 많이 하셨네요.
시험관 계속 하실 건가요?

이번 차수는 중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몸이 이렇게 안 좋은데, 본인 몸 먼저 챙겨야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진료실을 나오며 왈칵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중지 결정을 말했더니 약간의 실망이 느껴졌다. 그마저도 서운했다.




그날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왜 나 혼자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할까?
나는 정말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걸까?
출산한다고 삶이 꽃길이 되나?
지금 이건 진심인가, 집착인가?


시작은 ‘안 생기면 어쩔 수 없지’였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집착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국 이건 내 몸에 하는 일이고,
당사자는 나니까
멈출지 진행할지에 대한 모든 권한도
나에게 있다는 걸.


며칠 산책을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이제 멈춰야겠다.”

요로결석은 다행히 약물치료로 자연 배출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나는 시험관을 포기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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