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산악 등반가 샤를 비드머는 약 백 년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신체기관인 모든 감각 기관은 공간을 이용한 것 에 맞춰져 있다"라고
우리 인간은 공간을 이동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말에 설득력이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언제나 공간 속에 있습니다.
집, 회사, 음식점, 카페, 자동차, 지하철, 버스 등
정지해 있는 순간에도 이동하는 순간에도 우린 공간에 있습니다.
특히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회사라는 공간에
그 안에 사무실 내 자리라는 공간에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집니다.
방송국 또한 한 공간에 나름 오랫동안 있기가 힘든 환경입니다.
조직이 개편되기도 하고, 인사가 나기도 하고,
여러 이유 때문에 물리적 자리 변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곳입니다.
업무상 변동이 없더라도, 회사의 변수로 인하여
내 공간은 층이 바뀌기도 하고, 자리가 바뀌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저 또한 사무실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 자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일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팀이 존재했던 적도 있고,
아예 우리 팀만 별동대처럼 사무실 한 공간에 오롯이 있었던 적도 있고,
같은 팀이라도 블록이 떨어져 일했던 적도 있고,
같은 팀이라서 일렬로 앉아서 일했던 적도 있고,
지금은 같은 팀이 병렬 형태로 앉아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별동대처럼 있었을 때를 빼고는
공간엔 항상 다른 일을 하는 부서 사람들이 공존해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겪어보니, 다소 좋은 점보다 불편한 점이 발생했던 때도 있고,
또 겪어보니, 이게 훨씬 낫구나 생각된 적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공간에 대한 심리도 나름 학습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분명한 건, 원활한 소통상 너무 멀리 떨어진 건 좋지 않았던 것 같고,
그렇다고 직속 상사와 너무 일렬로 붙어있는 것도 업무상 효율이
확 오르는 것 같진 않습니다. 일하는데 신경 쓰이는 것들도 있으니까요.
결국 팀별로 물리적 거리의 최소화된 합리적 지점을 어디로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렇게 업무와 '공간'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하다,
최근 우연히 공간 심리학이란 책도 접하게 됐는데,
목차만 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무궁무진했습니다.
다소 흥미로운 것들 중 우리나라와 진짜 다른 것이 있었는데,
바로 칸막이입니다.
우리는 칸막이 없는 사무실은 상상이 잘 안 되는데,
독일에선 칸막이 사무실이 인기가 없다고 하네요.
우선 칸막이가 있으면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고,
칸막이로 구분된 수많은 책상 중 한 곳에 앉아있으면,
여기저기서 통화하는 소리,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
저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분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 근무하는 사람일수록 그나마 보장받을 수 있는
개인 공간을 사수하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고 하네요.
실제로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프라운호퍼 연구소에서는
'환경의 제어'가 사무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근무 만족도에 얼마나 기여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1996년 이래 '오피스 21'이라는 장기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요.
지금까지 도출된 주요 결과 중 하나는 직원이 작업환경을
본인 입맛에 맞게 꾸밀 수 있는 허용치가 높을수록
근무자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 무려 1700만 명의 근로자가 매일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출근하고 있는데, 그들은 밝고 아늑한 색채로 둘러싸이고,
동료와의 대화가 가능한 사무실을 원했고,
특히 동료들에게 자기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게 차단할 수도 있는 두 가지 형태를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아울러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환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지위나 경제적 여건이 하락해서
단 두 명이 하나의 공간을 쓰든,
서른 명이 큰 공간을 나눠 쓰든 상관없이 그 욕구는 같았다고 하네요.
일터에서의 영역의 주권은 사전에 충분히 계획이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만 한다고 '오피스 21'연구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진짜 사뭇 다른 연구결과란 생각이 듭니다.
우린 회사에서 언제나 지정된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 숙명의 근로자인 것과는
다르게 말이죠.
얼마 전에 회사 공간 속에서 해프닝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에겐 정말 오~랜만에 겪어본 사소하지만 황당했고,
결론적으로 깨달음을 준 에피소드였습니다.
우리 기자 녹화가 원래 하던 4층 뉴스 스튜디오가 아닌,
2층의 다른 스튜디오였는데, 원래 계획했던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름다리를 건너가야지란 마음으로 우리 팀 인턴 친구들과
여유롭게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2층에 도착해 구름다리로 가려하는 순간 문이 있었고,
문을 연 순간 건물은 막혀있었습니다. 순간 갇힌 기분이 든 건 왜일까요?
아무튼, 지금 회사 건물 일부가 공사 중이라 그랬던 것인데,
순간 너무 당혹스러워서, 그 짧은 시간에 저 2층 스튜디오를 어떻게 가야 하지?
라는 말도 안 되는 길 찾기 회로 얽힘이 잠깐 있었습니다.
결론은 그냥 1층으로 내려가서 다소 가로질러 걸어가
반대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가면 되는데,
전 생방송도 아닌데, 우리 친구들과 급히 뛰어갔습니다.
우리 인턴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절 따라 뛰다가
'작가님~ 아직 5분이나 남았어요~'라는 말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우리가 왜 뛰고 있는 거지? 하면서요.
알았던 길이 막혔을 때의 당혹함을 오랜만에 경험한 탓인 거겠죠?
길에 대한 뇌 회로가 꼬인 순간 미로가 생각났는데,
오늘날의 미로는 신비주의 신앙을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상을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조경예술분야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미로는 인기를 누리고 있죠.
제주도의 김녕 미로공원도 꾸준한 인기가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인지 본의 초대형 미로 관계자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길을 잃었다가 다시 제길을 찾아가는 것, 불안한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판단력을 믿어보는 것, 이런 재미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미로의 마력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공간이 우리에게 다소 영향을 줄 순 있어도
공간이 우리를 지배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공간이 더 나아가 나의 공간이
편안하고, 즐겁고, 효율적인 공간이 되도록 하는 건
우리의 마음가짐과 내공에 달려있는 거겠죠?
미로에 당황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내공을요.
< 오늘의 속삭임>
환경 심리학자 위르겐 헬 브뤼크는 천장이 높을수록
사람 간에 허용되는 거리는 좁아진다고 합니다.
똑같은 면적이라도 천장이 높을수록
품고 있는 공간이 크므로
그 안에 있는 사람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넉넉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 공간의 심리학" - 발터 슈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