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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Oct 26. 2020

투쟁의 세계, 연대의 세계

싸우고 들어 온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

도준이가 갓 태어난 후 신생아 육아에 허덕일 때 주변 선배 부모들이 얘기해주었던 일종의 격언 같은 게 있다.


"Little kids, little problems; big kids, big problems."


아기 때는 먹고 자고 입는 것만 해결해주면 되지만 점점 자라면서 더 어려운 문제가 많아진다는 말이다. 물론 당시엔 '어떻게 이거보다 더 힘든 게 있지?'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아이가 조금 크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문제가 점점 적어진다.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점점 커진다.


며칠 전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 얼굴을 긁고 왔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다투다가 빼앗기지 않으려 폭력을 썼나 보다. 흉터가 남을 만큼 상처가 깊어 친구가 병원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럴 땐 많이 난감하다. 가르친다고 가르쳐도 집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다친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혹 흉이라도 지면 우릴 평생 원망하게 되진 않을까. 손을 쓸 길이 없는 문제에 무력감이 든다.


이것만으로도 벅찬데 더 어려운 문제도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당연히 폭력을 쓰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양보만 하라고 가르칠 수도 없다. 누군가 아이의 몫을 빼앗아가려 할 때,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나가라고 할지 아니면 손해 보더라도 그냥 주라고 할지 고민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다양한 삶의 형태만 있을 뿐이다. 아이의 양육 방향에 대한 고민은 이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아이는 내 삶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내가 나의 몫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말씀을 금언으로 삼고 살았다. 욕심도 별로 없고 거절도 잘 못하는 내가 지금껏 큰 손해보지 않고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게 기적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나는 세상을 투쟁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싸우지 않고도 언제나 내 몫은 있었고, 주어진 것 이상의 몫을 요구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이해하고 나눠주면 서로 행복해졌다. 그렇게 나의 세계는 화해와 연대와 연합의 세계로 지어져 갔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천지에 있고, 그 사람들과 기를 쓰고 싸워 이겨내야 자기 몫을 챙길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몫을 키우기 위해 이해관계로 얽힌 집단을 동원해 세몰이를 하기도 한다.


나야 지금껏 운이 좋게 순진한 생각으로도 손해 없이 잘 살고 있지만, 내가 어느 순간 그 투쟁의 희생양이 될지, 혹은 도준이가 나처럼 운이 좋지 않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부터라도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해야 하나. 도준이가 자기 몫을 지키며 살게 하기 위해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가르쳐야 하나.




어느 순간 인생의 고비에 생각이 달라질지 나도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은 투쟁과 각자도생보단 화해와 연합에 더 가까이 머물러 있다. 자기 몫을 지키려 아등바등 사는 삶보다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삶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실제로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내가 악하다 보는 집단도 나름 거기까지 이르게 된 이유가 있으며, 내가 선하다고 보는 집단도 결국 연약한 인간의 모임에 불과하다. 가끔 선을 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대다수는 받아들일 만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예외를 일반화할 필요 없고,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소셜미디어를 하면서 마음이 자주 상하는 것도 이곳에선 세상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쁜 사람은 다 나빠야 되고, 나쁜 정권은 다 나빠야 되며, 나쁜 나라는 다 나빠야 된다. 공과 과를 균형 있게 살펴보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 노력하는 사람은 회색분자 취급을 받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어느 ‘편’에 유리한지에 의해 평가된다. 나도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지난 1년 반 동안 그런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최근에 스웨덴 방역 대응 관련해서 나름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적어도 소셜미디어 안의) 세상이 얼마나 투쟁의 장인지 절절히 느꼈다. 스웨덴이 ‘멍청한 이유로 사람을 죽인’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무리 원자료를 들여다보고 실제 정책을 뜯어봐도 언론이 말하는 악한 의도는 찾을 수 없었다. 스웨덴의 초기 대응에 구멍이 많았고 그 결과 소중한 생명을 무수히 잃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 계속 정책이 업데이트되어 왔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다. 무조건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첫번째로 사실관계에 어긋나고 두번째로 올바른 적용을 막으며 세번째로 이해 없이 비난만 난무하는 투쟁을 격화시킨다. 당연히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막아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적용점을 찾아보려는 내 시도는 종종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비과학적이고 비윤리적인 집단면역 정책을 주장한다’ 혹은 ‘악한 스웨덴을 옹호한다’ 등의 비난을 받았다. 준비 없는 방치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스웨덴을 (사실과 다르게) 좋은 예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서 방어하려는 시도로 스웨덴을 비난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무조건 봉쇄에도 부작용이 심각하므로 균형을 찾아가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이 양극단의 화해는 불가능할까. 나는 정확한 사실만이 그 화해를 가능케한다고 믿고, 상한 마음을 붙잡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계속 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내가 이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도준이에게 이런 가치관을 물려주는 것도 손해의 지름길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화해와 연대를 추구하는 삶에 꼭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일에 성실하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나와 남의 삶을 함께 세우는 노력을 계속하면 반드시 주변에 돕는 손길들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아득바득 내 몫을 좇지 않고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필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준 사람들 덕분이다. 최선을 다해 연합을 추구한 삶과 내가 받은 도움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투쟁과 속임과 세몰이만 있는 세상을, 이해와 베풂과 은혜갚음이 있는 세상으로 바꿔가려는 노력은 반드시 나와 내 아이의 삶에 열매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도 손해를 피할 수 없다면? 그러면 그냥 손해 보고 살면 된다. 그 정도로 우리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돕는 사람들과 다시 이겨나가면 된다. 힘이 없어 손해 보는 삶은 아무런 해악이 없다.


오히려 해악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할 때 생긴다. 그래서 나는 도준이에게 가르치고 싶다.


“언제든 화해와 연합을 추구해라. 너의 몫을 챙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지 말아라. 특히 네가 힘이 있을 때, 힘이 있는 집단에 속해 있을 때, 너의 편이 많을 때, 절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공격하지 말아라. 너의 영향력을 약자의 몫을 빼앗는 데 사용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걸로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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