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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Mar 19. 2021

과학이 할 수 있는 일, 정치가 할 수 있는 일

유럽의약청 AZ 백신 부작용 검토 결과 발표

* 주의. 백신 자체에 대한 정보는 질병관리청과 다른 백신 전문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엔 백신 접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제 고민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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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유럽의약품청(EMA)이 아스트라제네카/옥스퍼드 백신(AZ 백신)과 혈전 관련 이상사례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론은 예상대로 '관련 없음'입니다. 백신 접종자에게 혈전 색전증이 나타날 확률은 접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타날 확률보다 더 크지 않았습니다. 특정 제조단위가 더 위험하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결과를 발표하면서 EMA 청장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라는 백신의 '이점'이 백신 부작용의 '위험'을 상회한다(the benefits of the vaccine in combating the still widespread threat of COVID-19 continue to outweigh the risk of side effects)"였습니다. EMA의 판단을 기다리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등은 결과 발표 후 즉각 접종을 재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딱 좋았을 텐데 과학은 종종 애매한 결론을 냅니다. 일반적인 혈전 관련 질환은 백신 접종과 상관이 없지만,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혈소판 감소증 사례(뇌정맥혈전증 포함)는 "AZ 백신과의 관련성을 확실히 배제할 수 없다(cannot rule out definitely the link between these cases and the vaccine)"라는 말이 덧붙습니다. 관련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학부 때 들은 계량경제수업에서 교수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귀무가설 기각은 인과관계가 있다는 게 아니라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부정할 증거가 있다는 거야." 아직도 두개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제 EMA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부정할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질병인 전신성 혈관 내 응고(DIC)와 뇌정맥혈전증(CVST)이 백신 접종자 2천만 명 중 각각 7건, 18건 보고되었고 이중 9명이 사망했습니다(백만명당 0.45명 사망). 아주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EMA는 이 확률이 코로나19 유행 전의 자연발생률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 판단했습니다. 이는 50세 미만의 젊은 층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왜 백신 접종자에게 더 높은 발생률이 나타나는지는 아직 알 수 없고, 아직 백신이 이 질환을 야기했다고 볼 증거도 없습니다(단순 통계적 착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EMA는 포착된 위험을,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고 해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련 사실을 백신 접종 시 환자에게 알리라고 권고했습니다. 제품 정보에 해당 부작용에 관한 정보가 실릴 예정입니다. 


(노파심에 강조하지만 일반적인 혈전 관련 질환은 백신과 관계가 없고, DIC와 CVST도 매우 드물게 나타납니다.)




이쯤 되면 좀 짜증이 납니다. 맞으라는 건지 맞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접종의 이득이 부작용의 위험보다 크다는 말은, 백만 명 중에 0.45명이 나 또는 내 가족이 되면 아무 소용없는 얘기입니다. 열심히 피해 다녀 볼 수 있는 코로나19의 위험은 내발로 걸어가서 맞을 때 생기는 백신의 위험과 단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과학이 주는 것은 통계와 확률을 바탕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할 뿐입니다. 


그러나 백신 접종은 꼭 필요합니다. 코로나19는 사기가 아닙니다. 제가 연구한 유럽 곳곳의 사례를 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라 기저질환 때문에 죽은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틀린 말입니다. 코로나19가 심각한 지역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특히 고위험군에서 집중적으로 초과사망이 발생했습니다. 아주 낮은 가능성의 백신 부작용 사망은 큰 목소리로 강조하면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은 애써 '기저질환 탓'으로 축소하는 심각한 모순이 몇몇 분들께 보입니다. 


백신 접종은 고위험군과 환자를 직접 접촉하는 필수인력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실제 접종 데이터는 (종류에 상관없이) 백신이 사망 위험과 입원 위험을 감소시킨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유행 통제를 위해서 경제활동인구의 접종도 필요합니다. 1차 이상 접종자 50%가 넘은 이스라엘의 경우 봉쇄 완화 이후에도 감염자 수가 감소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경제활동이 감염 확산 정도와 연동되어 있는 한, 확진자 수를 줄여야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합니다. 모두를 위해서 백신 접종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과학이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누가 사람들을 접종센터로 이끌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정치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정치는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하는 일련의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격려하고, 정확한 정보를 유통하며, 희생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모든 행위가 정치입니다. 정치인들 스스로가 이런 행동을 해야겠지만, 사회에서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그들의 역할입니다. 


우리 정치가 이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름 기대를 걸었던 정치인조차 유독 백신 문제만 나오면 비과학적, 반지성적 행태를 보이는 모습에 저도 여러번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 일부 야당의원들이 백신을 어떻게 정쟁에 활용하는지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못하니까 손 놓고 있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은 과학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채울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해야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정치인들은 자기 팔이라도 걷어붙여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칼럼에서 '아빠의 무관심' 같은 '정치인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며 "정치인은 입 다물자"라고 주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빠피셜) 육아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고 있는 아빠로서 다소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한 (돈은 잘 주는) 아빠가 아니라 제대로 된 아빠입니다. 우리에겐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합니다. 저는 정치인들에게 자기 일을 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할 의무를 느낍니다. 과학에 기반한 정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정치, 신뢰를 줄 수 있는 정치를 요구합니다. 지금 어느 때보다 그런 정치가 절실합니다. 



관련 발표: https://www.ema.europa.eu/en/news/covid-19-vaccine-astrazeneca-benefits-still-outweigh-risks-despite-possible-link-rare-blood-clots


관련 기사: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10319/105954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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