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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l 27. 2019

기능인가 관계인가

해외에서 아기를 키우며 느낀 점


 오늘 글엔 공개적으로 나누기 부끄러운 내용이 더러 있다. 그래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을 위로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은 분들께 조언을 구하기 위해 글을 적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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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미디어에는 웃고 있는 사진만 올리지만 우리 부부에게 해외생활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별히 도준이를 우리 둘만의 힘으로 키워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무래도 아내가 아이를 보는 시간이 많으니 육아 부담은 아내가 더 크게 느낀다. 부모님이 계시면 일주일에 한두번이라도 아기를 맡기고 우리만의 시간을 가질텐데 영국에서, 남아공에서 그런 여유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도 나도 점점 지쳐갔다. 특히 아내가 더 심했다. 말도 문화도 다른 타국에서 아기를 낳고 키우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국에 있을 때는 그나마 좀 덜 했다. 부모님도 몇 개월씩 와계셨고 주변에 도움 주신 한인 분들도 많아 그럭저럭 이겨냈다. 한국에서 간간히 놀러 오는 친구들도 큰 힘이 되었다.


  남아공에 와서는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정착하는 것은 아내에게도 도준이에게도 벅찬 일이었다. 또 도준이가 크면서 점점 더 활발해져, 따라다니며 맞춰주기가 만만치 않았다 (누구 닮았는지 정말 오지게 까분다). 재정은 빡빡하지, 도와줄 한국인도 별로 없지, 주변은 위험해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지, 아내에게 이곳에서의 삶은 압박의 연속이었다.


  그러다보니 작은 충격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 한군데서 계획이 틀어지면 서로 책임을 묻다가 기분이 상해 결국 폭발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 애기 앞에서도). 돌아서면 후회할걸 알면서도 감정은 이성으로 컨트롤되지 않았다. 또 반대로 갈등을 피하려다 보니 서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각자 해야 할 일들만 겨우겨우 해내는 날들도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바라왔던 결혼 생활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번에 영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부모님의 배려로 정말 오랜만에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있었다.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간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있어도 주로 과업을 감당하기 위해 각자 어떤 역할을 할지만 얘기했지 (거의 전략회의 분위기),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데이트"는 안 한 지 너무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키우며 해외에서 살아남는 일이 너무 벅차서 애초에 결혼한 목적인 "관계"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힘든 일은 계속해서 있어 왔다. 결혼 전에도 오랜 인고의 시간이 있었고 아기 태어나기 전에도 생활비에 등록금까지 마련하면서 공부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도 없었다. 이런저런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엔 극복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둘 사이의 변하지 않는 관계 때문이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도 서로의 위로와 격려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저절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달간 우리 부부 사이에 생긴 문제는 친밀함의 부족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자연히 서로를 향한 관심이 나눠지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며, 육체적으로 피곤해 남는 시간에도 쉬기 바빴으니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대상으로 대하기보다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큰 문제였다.



  예전에는 과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평생 살아야 되는데 서로만 바라보면 언젠간 증이 날 수밖에 없으니 반드시 둘이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해야만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결혼한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친밀한 관계가 기초가 되지 않으면 과업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나마도 잘 해낼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고 이것저것 해주지만, 정작 애기 앞에서 싸우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좋은 커플이 되지 않으면 좋은 부모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남의 목적이 서로였음을 기억하기로 했다. 아이도, 우리 둘이 남아공에서 이뤄낼 일들도 전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와 함께하는 시간과 포용과 격려와 친밀함, 곧, 관계이지, 기능이 아니다.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지만 우선순위를 정해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애기 잠들고 나서 하던 전략회의 시간을 데이트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려 한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들은 나눠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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