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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Oct 15. 2019

사실, 믿음, 그리고 소통

의심의 미덕에 대하여

요약: 진실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음보다는 의심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의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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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 보도에서 인상 깊었던 네 가지 장면.


 #1. 윤석열 별장 접대 수사 무마 의혹


 한겨레21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관련 의혹을 제기한다 (링크). 김학의 사건 성접대 제공자로 지목된 윤중천 씨가 검찰과거사위 수사단과의 면담에서 윤 총장을 언급했으나 검찰에서 사실관계 확인 없이 수사를 종료했다는 기사이다. 대검찰청과 당시 총장 인사검증을 담당했던 조국 법무장관은 즉각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밝힌다. 심지어 대검찰청에서는 허위사실 유포에 대해 민형사상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강경하게 대응한다.


 후속 기사들을 토대로 보면 "수사단 면담에서 윤 총장을 아냐는 물음에 윤중천 씨가 모른다고 답한 것" 정도가 전부이고 이 정도로 윤 총장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야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보인다.


 내가 흥미 있게 본 것은 이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국 장관 관련 의혹은 가짜뉴스로 치부했던 사람들이 윤 총장 관련 의혹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당장 구속해야 된다거나 총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거나 하며 들고일어났다. 심지어 한겨레도 "타락"했다며 절독한다던 사람들이 드디어 한겨레가 정신을 차렸다며 환호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조 장관 관련은 정당한 의혹 제기라며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윤 총장 관련은 가짜 뉴스며 정치적 의도를 지녔다고 매도한다. 한겨레가 조국 장관의 의혹을 보도할 땐 용기 있다며 추켜세우던 사람들이, 이제 정권의 나팔수가 됐다며 공작정치의 선봉 인양 비난한다.



#2. 정경심 교수 자산관리인 인터뷰


 정경심 교수의 자산관리자였던 김경록 씨가 유시민 씨와 인터뷰를 한 내용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다. 그간 김경록 씨의 검찰 진술은 언론에서 꽤나 비중 있게 다뤄져 왔으나 인터뷰를 통해 기존 언론이 김 씨의 발언을 편향적/선택적으로 보도해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김경록 씨가 장시간 인터뷰를 했으나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 발언만 떼어 보도한 KBS가 집중포화를 받았다. 또한 인터뷰 직후 김경록 씨가 "유시민 씨와 인터뷰한 것을 후회한다"라고 발언했다는 기사조차도 바로 다음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간 얼마나 왜곡보도, 오보가 많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역시 흥미 있는 건 사람들 반응이다. KBS가 왜곡했는지 알릴레오가 왜곡했는지 설왕설래다. 결국 유시민 씨는 김경록 씨의 문자 (방송이 본인 의도를 잘 반영했다는)와 인터뷰 전문을 공개하고 (링크), KBS 역시 뒤따라 김 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공개한다 (링크). 두 인터뷰에서 김경록 씨의 발언은 큰 차이 없이 일관된다. 내 판단에 상당 부분 조국 정경심 부부에 유리하고, 일부만 불리하다. KBS는 가장 불리한 부분만 따왔고, 유시민 씨는 유리한 부분들 위주로 소개하는 동시에 그간 보도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인터뷰 전문이 공개됐음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터뷰가 사람들의 서로 상반된 믿음을 동시에 강화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3. 조국 딸 인터뷰


 얼마 전 뉴스공장에서 조국 장관 딸의 인터뷰를 내보냈었다 (링크). 그간 제기됐던 몇 가지 의혹들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전에 나왔던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다. 과장하거나 해석을 잘못한 게 아니라 사실관계 자체를 잘못 썼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조 씨가 검찰서 "서울대 인턴을 집에서 했다"라고 진술했다는 보도(링크)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본인은 검찰에서 해당 발언은 물론 그런 취지의 발언조차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조국을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 인터뷰를 보고 이제야 진실이 밝혀졌다며 안도한다. 조국 장관 딸에 대한 덕담도 필수이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멋지게 잘 자랐다고.


 물론 전혀 상반된 반응도 많이 있다. 딸이 엄마 아빠를 닮아서 거짓말에 능하다는 종류의 반응이다.



#4. 최성해 총장 인터뷰.

 마지막은 최성해 총장의 해명 인터뷰다. 조국 딸의 인터뷰와 양상이 비슷하다.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을 스스로 반박하는 내용이다.


 조국 딸을 인터뷰한 바로 그 뉴스공장에서 최 총장 관련 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 (관련 포스팅 링크). 표창장에 대한 증언을 하기 전에 한국당 의원 두 명과 만났으며 증언이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다는 보도였다. 최 총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자청하여 즉각 의혹을 반박했다 (링크). 한국당 의원을 만나 적이 없으며 자기와 사이가 안 좋은 집안 친척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앞의 장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 총장이 거짓말을 하느니, 김어준이 거짓말을 하느니 다양하다. 이런 종류의 의혹 제기 - 반박에선 둘 중 하나가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각자 기준에 따라 진실에 대한 자기만의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 네 가지 장면에 등장하는 보도나 해명 중 어떤 게 더 신빙성이 있는지 따져보려고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유일한 진실이지 않을까 싶다. 모든 보도는 기자의 해석을 거쳐서 나오는 가공물이며, 심지어 사건의 당사자도 기억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왜곡하여 잘못 전달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어떤 보도를 진실로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데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인지편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파편적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더라도 사실과 사실 사이를 잇는 데엔 독자의 해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정경심 교수가 자산관리인에게 WFM에 대해 물어본 것이 사실이어도 정 교수가 WFM 경영에 관여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엔 믿음이 필요하다. 한 사안에 대한 수많은 다른 반응은 수많은 다른 믿음의 존재를 증명한다.


 물론 이 믿음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경험과 훈련을 통해 부분적인 사실만 가지고도 실체적 진실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각도의 정보를 모아 살펴본 후 내린 결론이 편향적인 정보만 접한 사람의 결론보다 더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개개인의 믿음이 아무 과정 없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에 근거한 판단도 어느 정도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누구도 자신의 결론이 100% 진실이라고 과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의심하지 않는 과도한 믿음"은 오히려 신뢰할 만하지 않다. 끊임없는 의심만이 진실에 더 가까운 믿음을 가지게 한다.


 학자들도 자신의 가설을 검정하기 위해 정교하게 디자인된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하고 수많은 다른 반론을 검토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온 결론을 완전무결한 진리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정보가 나올 시 자신의 믿음을 업데이트한다 (관련 글 참조). 의심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 의심은 또한 서로 다른 믿음 간 소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가 내린 결론이 불완전한 믿음에 의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내 믿음에 문제가 있지 않나 점검하게 된다. 내 말만 진실이라고 핏대 세우며 우길 수 없게 된다. 의심은 소통을 시작하게 한다.




 지난 몇 주 간 (이제는 사퇴한) 법무장관의 거취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와 수많은 구호들이 오갔다. 조국에 찬성하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옳다는 쪽이든 그르다는 쪽이든, 다 제한된 정보를 자신의 믿음이라는 체에 걸러 내린 결론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었다. 완전한 가짜뉴스에 기반한 천박한 믿음도 있는 반면, 사실과 사실을 본인의 해석으로 이은 조금 더 고상한 믿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백퍼센트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서초동이나 광화문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 중 믿음을 진실로 둔갑시킨 것들은 조금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불명확한 가정에 기초해 이미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분노할 뿐 아니라 무리한 요구까지 늘어놓는 것엔 전혀 동의가 되지 않았다(이런 경향은 둘 집회 모두에 냉소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조국을 구속해야 되느니, 윤석열을 구속해야 되느니, 문재인이 자유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 한다느니, 적그리스도니 등등 무엇이 그들을 의심 없는 확신에 이르게 했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자연히 양 진영 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1).


 나는 내 주장 중 "믿음의 영역"에 속해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극단의 대립은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의심하는 만큼 나 스스로의 주장도 의심하면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의심이 상대방과 대화하고 의견을 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낼 거라 확신한다.


 전쟁 통에 인류애를 꿈꾸는 듯한 한가한 얘기인 걸 알지만 이런 게 연구자로서 특권이라 생각하고 몇 자 보탰다. 쓰다 보니 양 진영을 다 비판하는 글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논조는 일관되다. 나는 과신을 경계하고 의심을 환영하며, 독선에 반대하고 소통을 지지한다. 나는 편향된 정보에 의한 잘못된 믿음의 강화를 거부하고 성찰과 반성을 통한 믿음의 끊임없는 갱신을 추구한다. 이 정도면 명확한 것 같다.



 (주1) 이런 과도한 믿음이 유독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많이 관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본 이후에야 바른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과정 다 생략하고 그냥 믿으라는 종교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빤스를 내려라 해서 그대로 하면" 진정한 성도라고 하는 사기꾼이 목사라고 불리고 있으니 알만 하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거기서 오는 풍성한 비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때때로 경험한다. 하지만 치열한 고민 끝의 순종이 더 값지고,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 가짜와 진짜를 분별할 수 있다. 의심은 신앙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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