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Dec 26. 2019

일상의 의무

아기 밥먹이면서 든 생각들

 출근시간이 자유로운 이점을 활용해 아침에는 주로 내가 도준이를 본다. 아직도 통잠을 안 자는 도준이가 밤에 깨면 꼭 엄마를 찾기 때문에 자는 동안은 엄마가, 깬 이후에는 아빠가 아기를 보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래야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자고 또 하루 종일 아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아침밥을 해서 먹이는 게 큰 일이다. 아빨 닮아서 그런지 도준이가 빵이랑 씨리얼은 잘 안 먹는다. 꼭 밥을 먹여야 하는데 여기서 구할 수 있는 한식 재료가 한정돼서 메뉴 선정이 늘 고민이다.


 한번은 아침에 아보카도비빔밥을 해봤다. 양파를 볶은 후 간장, 올리고당, 맛술을 넣고 졸여 데리야끼 소스를 만들어 놓으면 그다음은 아주 간단하다. 계란 굽고 아보카도 잘라 넣고 김가루 조금 뿌려서 비비면 끝이다 (와사비 조금 넣으면 더 맛있음).


 처음 해서 도준이에게 먹였더니 맛있다고 좋아한다. 우리가 먹기도 딱 좋다. 남아공은 아보카도가 싸서 가격 부담도 없다. 이거다 싶었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네다섯번씩은 아침으로 아보카도비빔밥을 먹은 것 같다.


 처음엔 그릇을 싹싹 비우며 맛있게 먹더니 조금 지나선 슬슬 안 먹기 시작한다. 질렸나 보다. 밥을 비비고 있는 걸 보면 "이거 안 먹어 하양밥 먹어"하며 밥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좋은 아침메뉴 없어졌다고 아쉬워하며 한동안 안 먹였다.


 그러다가 오늘 오랜만에 다시 비빔밥을 했다. 옛날 생각이 났는지 두세입은 잘 먹다가 금방 질린 표정이다. 아는 문장을 다 동원하며 꾀를 부리기 시작한다.


 시작은 "속아파"이다. 먹기 싫은 음식이 있으면 그렇게 배가 아파지나 보다. 도준이 안 아픈 거 알아 더 먹어 하니 그다음엔 "배불러"라고 한다. 이제 세입 먹었는데 어떻게 배가 부르나. 더 먹어야 된다고 억지로 밥을 들이밀어 넣었다. 그다음에 먹긴 먹는데 "너무 많아" 하며 숟가락에 있는 밥의 반만 베어 문다. 평소에는 잘만 먹었는데... 숟가락에 남은 나머지 밥을 주자 급기야 다 뱉어내며 마지막 한마디를 보탠다.


  "맛이 없어."


그래도 세입 먹고 말 수는 없으니 어제 산 딸기 요거트로 꼬셔서 결국 몇번 더 먹였다. 평소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양이다. 그러고 나서 약속대로 요거트를 주니 자기가 숟가락을 잡고 바닥까지 긁어먹는다. 속도 다 나았고 배도 다시 고파졌나 보다.


 매일 아침마다 김치볶음밥을 먹었다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님께서 해준 김치볶음밥이 워낙 맛있기도 했지만 매일 같은 음식을 불평 없이 먹는 친구와 친구 동생도 키우기 편한 스타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메뉴 걱정만 안 해도 육아부담이 꽤나 줄여들 것 같으니 말이다.


.....


 매일 같은 밥을 질리지 않고 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처럼,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박사과정 땐 연구자로서의 여정을 막 시작해 단 한 작품에만 몰두하면 됐었다. 첫 작품을 잘 마치고 나면 PhD라는 타이틀이 주어진다.


 박사 받은 이후부턴 다소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다. 또 다른 연구과제를 찾아내고, 방법론을 조금 더 발전시켜 분석하고, 서론부터 결론까지 한 편의 논문을 적어내는 싸이클이 일년에도 몇 차례씩 반복된다.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의 신선함과 논문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작업이 반복될수록 점점 옅어진다. 앞으로 20년 이상 이 지루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선교지를 돌아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와서 내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포장해서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있지만 사실 나처럼 그냥 한번 가서 보고 오는 게 제일 쉬운 일이다. 매주 같은 지역에 가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길 반복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이 일을 수십년 간 해오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내가 늦은 나이까지 공부하고 아직도 진로가 안 정해진 채 비정규직으로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지만 매일매일 펼쳐지는 새로운 이벤트들에 지루할 틈은 없다. 한국에 돌아가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한편으로 들면서도 또 내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성취는 일상의 반복을 통해서 일어난다. 어느 한순간 요행으로 얻어진 열매는 금방 사라지게 마련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매일의 연구가 쌓이고 쌓여서 세세한 부분을 아우르는 거대한 통찰을 만들어낸다. 한 번의 수련회나 한 번의 단기선교가 아닌 매일의 말씀묵상과 실천이 우리의 인격을 바꾸어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쏟아부은 사랑이 한사람씩 한사람씩 변화시켜 결국 한 마을의, 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낸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내가 이 일상의 의무를 얼마나 잘 감당해 왔었는지 돌아본다. 연구든 신앙생활이든, 남아공에 와서 어떤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잘못된 도취감에 빠져 정작 매일 주어지는 과업들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장소에 출근해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의 분량을 채워내고 있는 친구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그들의 노력 덕에 나 같은 한량들도 발전된 사회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년에는 나도 일상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감당해내어 친구들의 짐을 나눠지기를 소망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 컸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