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태스크가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데드라인까지 미뤘다가 닥쳐서 부랴부랴 하는 스타일이라면, 아내는 불확실함을 못 견디고 꼼꼼히 계획해서 미리미리 하는 편이다. 일이 하나 잘못돼도 난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넘어가는 반면 아내는 그냥 안 넘어가고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 백방으로 노력한다(ex. 물건 잘못 샀을 때 - 난 그냥 쓰고 아내는 무조건 반품/환불. 그게 안되면 중고로라도 팔아버림).
이 차이는 아기를 키우면서 더 드러난다. 아기가 조금 아프면 아내는 한껏 예민해져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의사 친구들한테 연락을 돌려 물어본다. 늘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며 조금만 심하다 싶으면 응급실로 달려간다.
나는 정반대다. "아기는 크면서 다 아픈 거야, 아파야 면역이 생겨"하면서 웬만큼 아픈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특별한 근거 없이 괜찮을 거라고 낙관한다. 응급실 가자고 하는 아내에게 꼭 가야겠냐고 수십 번 묻는다.
이럴 땐 주로 과민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게 현명하다. 실제로 심각한 문제라면 안일한 태도의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더라도 과민한 대응을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줄이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나도 변명은 있다. 일단 매번 걱정하고 고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 하며 태평하게 있으면 마음은 편하다. 세상 살면서 모든 게 다 마음먹은 대로 되진 않으니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내가 더 유리할 때가 많다(옆에 있는 사람은 복장 터짐).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면 중요한 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차분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둘의 차이 때문에 갈등이 자주 있는 게 사실이지만, 또 둘 중 하나만 있었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우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책 없이 낙관적인 나 혼자였다면 아무 성취도 없이 정신승리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뭐든지 예민하게 걱정만 앞세우는 아내 혼자였다면 일은 완벽하게 할지언정 스트레스 속에 정신이 피폐해졌을 것이다.
우리 둘이 대화로 서로의 차이를 잘 좁혀간다는 전제 하에, 나의 안일함과 아내의 과민함은 좋은 보완재가 된다.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나처럼 안일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아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본다. 통계적 사고가 익숙한 내 입장에서는 코로나19가 큰 위협은 아닌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이해는 된다.
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 사회가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한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 사회가 공황에 빠져 멈춰버리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스스로 완벽한 균형에 이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나에겐 내 아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태평함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전제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너를 필요로 하고, 너는 나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