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를 버리는과거와 미래에 갇힌 나의 물건들 일
4세 7세 두 딸, 집은 어느새 아이들 물건으로 가득했다. 7살 첫째의 그림일기장, 4살 둘째의 닳아빠진 애착 인형, 온갖 장난감과 책들이 거실을 점령했지. 그 틈에서 내 물건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1년 넘게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 잊고 살았던 오래된 다이어리, 그리고 빛바랜 사진첩들.
'언젠가는 살이 빠지겠지', '나중에 다시 입을 일이 있겠지' 같은 헛된 희망을 품고 옷들을 쌓아뒀다. 물건 하나하나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뒤섞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 옷을 입었던 날씬했던 20대 시절, 이 다이어리를 쓰며 꿈꾸던 30대의 모습, 그리고 아이를 낳고 언젠가 다시 복직하면 입게 될 정장들까지. 물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물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우리를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과거의 나를 놓지 못하거나,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의 삶을 낭비하게 만드는 거다. 물건을 쌓아두는 행위는 결국 ‘나’라는 존재를 과거와 미래의 파편 속에 가두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깨달음은 생각의 영역까지 확장됐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뒤엉켜 있었다. '오늘 저녁엔 뭘 먹지?',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할까?', '복직하면 잘 해낼 수 있을까?' 같은 잡념들이 둥둥 떠다니며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물건을 비우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 또한 비워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쌓아두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버리는 것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지 않을까? 물건을 버리는 행위는 단순히 공간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과정일 거다. 마찬가지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불필요한 관념들을 덜어내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확보하는 행위인 거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먼저, 1년 동안 입지 않은 옷 한 벌을 과감하게 버렸다. 이 옷을 입고 놀았던 과거의 추억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이 옷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막연한 불안감은 내려놓았다. 옷을 버리는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과 동시에 마음속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생각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수첩을 펴고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갔다. '해야 할 일', '걱정거리', '나만의 즐거움' 등 범주를 나누어 기록해 보니까, 막연하게 느껴지던 생각의 덩어리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그러자 복잡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건을 비워내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의 미련도, 미래의 불안도 아닌, 바로 이 순간, 아이들과 함께 숨 쉬고 있는 현재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한 거다.
버린다는 것은 결코 잃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담기 위한 준비다. 필요 없는 것들을 비워내야만, 비로소 새로운 의미와 경험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