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정민 Jan 21. 2020

죽기로 결심하다

할아버지의 울부짖는 고함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돈다. 주방 진열장이 할아버지의 포효에 뒤엎어질 듯 흔들렸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그 울음 같은 고함소리는 마치 이빨이 다 빠진 힘없는 사자의 마지막 절규 같기도 했다.
벌써 몇 해전부터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요구했던 것이 있다.
이미 지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어 성한 곳 보다 성치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 집을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짓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었다. ㄷ 자 모양으로 안 채와 사랑채 그리고 건넌방까지 있었다. 식구들이 많이 몰려와도 모두가 잘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 앞 장사는 없었다. 이 방, 저 방에 짐 들이 하나 둘 들이찼고 농사를 지으시던 할머니는 들이차는 가구와 짐들을 어찌하지 못해 그대로 방치해 두셨다. 수십 년 전에 고장 난 티브이까지 그대로 있었으니 뭐. 할머니, 할아버지가 늙은 만큼 집도 낡아 기울어져버렸다.
건넌방은 이미 창고가 되어 사람이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그 외의 방도 사정은 비슷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만 빼곤 ㅡ아니 그 방 역시 내 눈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지만ㅡ 처참하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엄마, 이모, 삼촌들은 명절만 되면 집을 고치자고 이야기했다. 돈이 문제라면 보태주겠다고 하며.
증손자, 증손녀까지 태어나 식구는 늘어가는데 명절만 되면 잠을 잘 곳은 예전보다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제일 큰 이유는 할머니를 위함이었다. 주방도 화장실도 성치 않은 곳에서 살림을 살아야 하는 할머니가 딸자식들의 눈엔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 역시 새 집을 짓길 원하시기도 했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집은 절대 고치지 않는다며 완강히 반대하셨다. 본인이 사시는 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평생을 도시로 나서는 법이 없으셨다. 집안의 모든 행사는 할머니 혼자 참석하셨다. 할아버지는 안 오시냐는 어린 나의 물음에 언제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소밥 주고 개밥 주고 닭 지켜야지.'

노인들만 사는 시골 깡촌이긴 하지만 할머니가 사시는 동네엔 이미 대부분의 집이 수리를 했다.
아예 새로 지은 집도 꽤 많다. 그렇잖아도 허름한 할아버지의 집이 더욱 볼품없어 보이는 건 당연한 일.
어쩌면 할머니는 동네 친구분들에게 몇 번이고 하소연을 했을지도 모른다.
'저 양반 때문에 집도 못 고치고 산다고.'

사건이 있었던 그날, 할어버지는 노인정에 갔다가 굉장히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동네 할망구 둘이서 집 좀 고쳐 살라고 옆에서 툭툭 건드렸다고 했다. 내 집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비위를 긁어댔던 것 같다.
"내가 집을 고치면 죽어. 이 집을 지을 때 스님이 그랬어."
"아이고, 90까지 살았으면 죽어도 되지!"
그 말이 불씨가 되었다. '죽어도 된다'는 그 말에 할아버지의 잔뜩 화가 났고, 분노는 집에 있는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아마 동네 할망구들에게 그딴 소리를 하고 다녔던 게 분명하다는 짐작이 분노의 이유였다.
'이젠 죽어도 되겠구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성난 모습에 놀라서가 아니다. 내 눈엔 진열장을 흔들어 대는 할아버지의 몸짓이 절규 같아 보였다.
할아버지의 눈은 이미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이 갈수록 살은 빠지고, 피부는 쪼그라들어 유난히 커 보이는 할아버지의 그 눈망울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죄여 왔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 고함에 깃든 울음이 느껴졌다.
더 살고 싶다는, 죽고 싶지 않다는 할아버지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90년이나 사신 할아버지는 초연하고 태연하고 느긋해 보였는데, 이미 삶의 이모저모를 다 겪어 겁날 것 하나 없어 보이기만 했는데, 설사 죽음이 지금 당장 닥쳐온다고 하여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할아버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맞을 고통이 보다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할아버지를 두렵게 만들었다.
개 밥 주고, 소 밥 주고,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는 그 당연한 일상을 이젠 영영 못한다는 절망에.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다는
살아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외로이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걸 모르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아! 아직 우리 아기들은 모르고 있을 테지. 만약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어디에 갔다' 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내 또 생각하겠지.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을. 태어났기 때문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삶이 축복인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잊고 산다. 죽음의 존재는 삶의 화려함에 곧 잘 묻히곤 한다. 생명의 빛이 짙은 어린 나이일수록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이가 들어 늙고 노쇠해져야만 찾아오는 것아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말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날짜를 본인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죽는 날 역시 그러하다는 걸 자꾸만 망각한다.
삶이 무한하다는 착각 속에 살게 된다.
할아버지의 절규는 흐릿하게 잊히고 있던 '죽음의 존재'를 흔들어 깨웠다.
슬픔에 빠진 할아버지를 엄마와 아빠가 부축하는 모습을 바라본 뒤 마당으로 나왔다. 그곳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깐.
겨울의 찬 공기가 폐 속으로 확 들어오는데 그 공기가 아까와는 다르게 반갑기도 또 서글프기도 하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축복인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으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책이 한 권 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이 그것이다.
한 수녀원의 작은 방에서 죽어가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바로 베로니카다. 네 통의 수면제를 모조리 다 먹고는 '이제는 끝이다'는 생각으로 삶과 이별을 한 그녀. 베로니카의 자살은 모든 이를 놀라게 할 만큼 의외였다. 안정적인 직장과 예쁘장한 얼굴, 모자랄 것 없는 부모의 지원으로 유년의 시절을 보냈으며 그렇다 할 문제나 사고 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를 죽어가게 만들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천국 대신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만다. 그렇게 죽기를 원했건만 살아남은 베로니카.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수면제로 인해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어봐야 일주일도 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곧 죽게 된다.
그런데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베로니카의 심장이 아주 멀쩡하다는 사실. 그러니깐 그녀는 지극히 건강하다는 그 사실을 병원장이 숨긴 채 베로니카의 손에 죽음을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소위 말하는 미친년, 놈들과 함께 생활을 한다. 누구의 비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걸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살아가는 그들 틈에서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 어떤 짓을 해도 이곳에선 아무것도 놀라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여긴 모두 미쳐있으니깐. 그 사실은 베로니카에게 다시금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삶의 시간은 단 일주일.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삶을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삶은 지겹고, 뻔하고, 살아봤자 새로운 것 하나 없으며 자신 역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수면제를 먹은 그녀는 그제야 깨닫는다. 삶의 매 순간 부모 선택을 따르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상적인 일'만 하고 살았던 그녀는 이제야 삶은, 삶의 의미는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그 어떤 동요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가는 정신병원 속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말한다.
'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건 나 자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했지.'
그리고 또다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이 곳을 탈출하여 삶과 직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분노와 증오, 고난과 좌절 기쁨과 행복과 같은 모든 것들을 느끼며 살고 싶다고. 얼마 남지 않은 삶 앞에서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두가 예상하듯 그녀는 자신의 삶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아마 베로니카는 앞으론 자살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을 때마다 내일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 것이고,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서 '이건 기적이야, 하루를 더 살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겠지.
그리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갈 테다. 오롯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죽음을 깨닫고 있는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삶이 엄청난 선물이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생각하면 그 무엇에도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순 없을 테니깐. 회의적은 태도로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삶이 선물이 되려면, 축복이 되려면 죽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이야기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고.
아마 베로니카 역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모험할 수 있었더라면, 그러한 모험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발견했더라면, 발견한 그 삶을
거침없이 살아냈더라면 자살은 애초에 하지 않았을 테다. 죽기로 결심하는 대신,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겠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삶의 모습을 흉내 내는 삶이 아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하고 바라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언제 늙었는지, 많이 야위고 노쇠해진 할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짧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매일 매일 좋은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