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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Oct 26. 2020

도토리 같은 기쁨

엄마의 태도를 익히는 중입니다. 



도토리 산책을 자주 했다. 걸음마다 떨어져 있는 도토리 알을 보며 아이와 함께 걸었다. 

도토리를 주울 때마다 가을 그 자체를 손에 쥔 것 같았다. 

작은 키 덕분인지, 도토리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구석에서, 틈새에서 다람쥐처럼 도토리를 찾아내는 아이들 때문에 떨어진 낙엽도, 색 바랜 풀도, 떨어지기 직전 비상등을 켠 듯 빨갛게 변한 나뭇잎도, 푸석푸석해 보이는 나무도 더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다. 

지긋이 바라보면, 애정이 짙어진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걷는 길은 시간으로 재면 딱 한 시간 코스였다. 

볕이 좋은 날, 바람이 시원한 날, 남편이 쉬는 날, 아이들이 원에 가지 않는 날, 그냥 걷고 싶은 날. 

갖가지 핑계를 대며 아이들에게 산책을 가자고 조르는 건 항상 나였다. 집 마당에서도 바쁘게, 기쁘게 노는 아이들이었으니깐. 산책 가자는 말 대신,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챌 다른 말이 항상 필요했다. 

“도토리 만나러 가자.”

그럼 아이들은 다람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와 도토리 알을 줍고 싶다는 앙증맞은 마음으로 길을 나서곤 했다.    

  

다른 동물처럼 몸에 지방을 축적해 놓지 않는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기 전, 자신이 자주 다니는 길에 도토리를 묻어둔다고 한다. 겨울잠을 자다가 배가 고파지면 일어나 먹을 심산으로.

그래 놓고 태반의 도토리는 찾지 못하는데, 참으로 우스운 건 그렇게 다람쥐가 묻어둔 도토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 숲 속의 건실한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도토리에서 도토리나무가 생겨나고, 그 도토리나무 덕에 다람쥐는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도토리를 줍느라 열중일 때면, 숲 한편에서 부지런히 도토리를 묻고 있을 다람쥐가 생각난다. 

찾는 것보다 못 찾는 게 더 많다고 하니, 겨우내 배곯지 않으려면 잠자는 곳 주변, 빼곡히 도토리를 심어 두라고 일러주고 싶어 진달까. 

그러면서 동시에 묻어둔 것 덕분에 되려 살아가게 되니, 아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도토리를 묻는 마음으로 작지만 소중한 것을 내 주변에 빼곡하게 심어두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찰랑찰랑, 일렁거린다. 

다람쥐처럼 나중에 꺼내 먹을 일용할 기쁨을 내 주변에도 알알이 묻어두자고.     


기쁘다는 마음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쥘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건 내게 기쁜 일이야!라고 주문을 걸어둔 일을 몸을 움직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쁨'이다. 

우연히 틀어 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우스운 장면은 잠깐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 줄 순 있지만, 그건 마음 끝이 간질간질 거리는 기쁨은 아니다. 

티브이를 보는 일이 기쁨이 되려면 나만의 정의가, 땅을 파서 도토리 알을 묻는 정도의 성의와 정성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잠이 든 늦은 저녁, 남편과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좋아하는 예능을 보는 건 내겐 기쁨이 된다. 그때의 우린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 없이 티브이를 보고, 웃는다. 그리고 도란도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내일의 계획을 털어놓기도 한다. 해야 할 일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늘어져있는 날이 더 많아 매일 그렇게 여유 있는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기쁨이 절실한 날엔 우린 티브이 앞에 나란히 앉는다. 나란히 앉는 순간, 마음이 괜히 간질댄다. 그건 '남편과 늦은 밤 티브이를 보는 일'이 기쁜 것 같다고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폭신한 이불에 들어가서 소설책 읽기. 

입안이 텁텁한 것처럼 마음이 그럴 땐, 박하사탕을 먹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기. 

남편과 아이들을 앞세우고 뒤 따라 걷기. 

화분에든 땅에든 식물 심기. 

가구 배치를 바꾸면서 묵은 먼지 쓸어 내기. 

읽어야 할 책더미 위에 새로 산 책을 올려두기. 

멀쩡한 토분에 레이스 끈 둘러 붙이기. 

버리지 못하고 쟁여뒀던 물건 한 꾸러미 갖다 버리기. 

흔들의자에 멍하니 앉아 햇볕 쬐기. 

즐겨먹지 않는 초콜릿을 입에 넣고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도토리처럼 작지만 내겐 확실한 기쁨이 되는 일. 또 무엇이 있을까...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야!라는 말을 내게 하며 나를 위해 움직일 때, 우리의 마음은 조금 든든해지기도, 또 괜스레 충만해져 또다시 살아나갈 힘을 가지기도 한다. 

다람쥐가 배고플 때 꺼내먹으려고 심어둔 도토리처럼, 마음이 허전할 때 꺼내먹을 나만을 위한 기쁜 일 리스트를 품고 살아가기. 리스트에 적어두고 잊어버린다고 한들, 손해 볼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안심한 채 일상 곳곳에서 기쁨이 될 만한 것을 수집해 두기.

잃어버린 도토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참!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지!!라는 마음을, 반가움과 아련함과 괜한 설렘 같은 걸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


조그마한 기쁨이 내 삶 곳곳에 분포되어 어느 날 울창한 도토리나무 숲이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작고 사소한 일에 조차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존재한다는 걸,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동력이 된다는 걸 이번 가을, 도토리 한 알이 알려주었다. 

도토리를 보면 이젠 기쁨 리스트가 떠오르는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씰룩댄다. 

가을만 되면, 가을 길에 떨어진 도토리만 보면 분명 나는 기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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