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태도를 익히는 중입니다.
확실하게 경험해 보지 않아 놓고선 성급하고 섣부르게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고, 내 말이 네게 도움이 될 거라는 무례한 착각을 하며 살아왔다.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으니 네 마음 정도는 거뜬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여기며 지냈다.
제 아무리 친한 사이 일지라도, 우리의 상황과 처지가 비슷할 지라도, 좁혀지지 않는 마음의 간격이라는 것이, 각자의 감정과 완전히 보여주지 못한 숨겨진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 지언데, 나는 어째서 그렇게 무지하게도 당당했는지 모르겠다.
결혼 전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많은 학부모를 만났고 많은 아이들과 생활했다.
애는 낳아보지 않았지만 육아는 다 안다고 착각했던 이유였다. 이미 착각 속에 빠진 내게 ‘애가 없으면 잘 몰라’라는 친구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얼마나 많이 지켜봤는데!‘
엄마는 돼 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애 셋은 키운 엄마처럼 굴며 친구에게 온갖 조언을 했었다. 너무 애달프으며 키우지 마, 어린이집에 애를 보냈으면 믿고 그냥 보내, 네 시간도 좀 가져라. 뭘 그렇게 전전긍긍하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애를 한 명도 키워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더불어 마음에 가닿는 말은 잡아끄는 말이 아니라 품어주는 말이라는 지혜 따위가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 몸의 감각이 마음과는 다르게 예민하고 민감하게 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온 몸의 촉수를 세우게 되는데, 그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지키려는 어미의 본능이었다. 동시에 본능으로도 잠재울 수 없었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 혹은 책임감과 불안감이 뒤엉킨 결과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사사로운 말과 행동에 큰 타격을 입게 되기도 한다는 걸, 끝이 없는 육체노동과 불쑥불쑥 들이미는 나의 민낯에 자존감이 팍팍 소진되어 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의 친구처럼, 유리 멘털이 되어선 푸념과 투정을 부렸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였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게 되다 보니 확신에 찬 말 한마디가, 잘하고 있는 중이라는 다정한 온기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말 한마디가 존재에 대한 인정이 되기도 하고, 불안을 지긋이 짓누르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그제야, 내가 경험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서면 어질러져 있는, 치우는 속도보다 어지럽혀지는 속도가 더 빨라 아이가 깨어있을 땐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집구석에 두 손 두발 다 들었던 날.
'어질러봐라. 내가 안달하나! 맘대로 해' 하고 통보했던 날.
아! 하고 떠오른 일이 있다.
먼저 아이를 키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구석구석 어지럽혀진 장난감을 하나 둘, 내 멋대로 정리하곤 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도 돌돌이로 치우고 먼지도 물티슈로 훔쳐냈다.
'애 키우는 집 다 똑같은 것 같더라' 그러면서 애나 한 번 더 안아줄 것이지.
내가 있는 그 시간만큼은 아이가 엄마에게 가지 않을 수 있도록 어화둥둥 업어주고, 안아주며 재미있게 놀아나 주기나 할 것이지.
친구가 왔다고 뭐라도 내놓으려고 할거 뻔히 아니깐, 바로 먹고 모조리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수 있는 간편한 음식 몇 가지 사 가서 한 끼 편안하게 때울 수 있도록 해줄 것이지.
야박한 시누이처럼 먼지 검사하는 것 마냥 방이나 훔쳐대고 있었으니 친구는 마음 한구석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금방 내가 치웠어!'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치웠는데 왜 더러워'라고 생각했으니 애 없는 친구는 애 가진 친구에게 이렇게나 무용할 뿐이다.
모든 스케줄이 아이를 향해 있고, 본인보다 아이의 물건, 아이의 음식, 아이의 기분과 상태에 초점을 맞춘 채 살아가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참으로 낯설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는데, 그것만큼 쓸모없는 다짐도 없었다지.
시판 이유식과 분유를 앞에 두고 마음 아파하는 친구를 멀뚱히 바라보며 도대체 어느 포인트가 슬픈 것일까 생각했는데, 생활비가 많이 든다며 불평하면서도 제일 좋은 것을 아이에게 내놓는 친구에게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핀잔했는데 그게 엄마의 마음이었다. 엄마가 아닌 나는 온전히 알 수 없었던 마음이기도 했고.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인정 같은 것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때문에 그녀의 감정과 심경이 피곤하다고만 느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 발치 멀리 떨어져 있으면 되려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기도 하니깐.
하지만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존중과 인정의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겪어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에 오롯이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마음 역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고스란히 받아주고, 따스하게 품어주는 말은 그럴 때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걸.
일상으로 돌아가 기쁘게 지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어 주는 말은 그러한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니깐.
괜찮아. 그럼 좀 어때서. 충분해.
애당초 거창한 해결책을 원하는 건 아닐 테다. 결국 제 삶의 문제는 저 나름의 방식으로 헤쳐나갈 것이니깐.
주변인의 역할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에 나오는 대나무 숲이나, 추운 겨울날의 따스한 담요나 파묻힐 수 있는 폭신한 베개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이젠 잘 안다.
몸속에서 힘이 솟아 나는 말은 실은 말이 아닌 것으로부터 전해진다는 걸 지금부터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
명확한 진실보다는 아스라하고 따듯한 품을 우리는 더 필요로 하다는 것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비슷한 상황은 있어도 똑같은 마음은 없다는 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