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에로스와 아가페 사이
결핍이란 기어코 그 사람의 틈을 파고들어 자리 잡는다. 보살핌이라는 결핍이 있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았다.
사랑하면 당연히 서로를 보살피고 애틋해하고 안쓰러워하게 된다. 부모에게서 독립해서 다시 내가 기댈 엄마를 찾는 본능으로 반려자를 찾는 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서로를 위해 기댈 곳이 되어주는 사랑은 필요하지만 서로 동등 해야 하는데 그 경계선이 참 어렵다.
남녀사이는 에로스적 사랑에 가깝다. 서로의 마음을 원하고 몸도 원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끌어 당기는 관계 그런 줄다리기 하듯 오가는 경계선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혹은 멀어질까 두려워하며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나는 아가페에 가까운 사랑을 했었던 것 같다. 부모 자식처럼 희생적이고 늘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주는 존재에 대한 결핍에 반 작용으로 오히려 내가 그렇게 사랑했다.
동등하지 않게 나는 상대를 늘 안쓰러워하고 애틋했고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가 빛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라며 희생적인 모습을 보이고 부담을 주고 아부를 했었던 것 이다. 그럼 상대는 기가 막히에 우리 관계의 상하를 깨닫고 나의 존재를 배경처럼 두었다.
에로스적 사랑에서 필리아 (서로를 애특해하고 서로가 잘되길 바라는 상태)로 넘어가야하는데 나는 아가페로 넘어가 나를 잃어버리곤 했었다.
내가 나로 서있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힘 없고 연약한 외톨이 어린아이다. 그렇게 사랑을 하니 누군가 다가오면 웅켜쥐고 떠나지 않게 해야된다고 전전긍긍했다.
혼자 남겨졌을 땐 또 누군가를 찾아해맸고, 나를 찾아주는 상대가 그저 고마워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 하고 마음을 줘버리고 했던 나의 20대. 반복해가며 쌓인 상처와 흔적은 다음 사랑에서도 작용하며 나의 성격처럼 자리잡았다.
혼자 있으면 괴로울만큼 외로웠고 둘이 있으면 그보다 나았지만 불안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오래 버틴다고 홀로서기가 되는 건 아니였다.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바라면 오롯이 혼자서 살아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혼자 살든 , 둘이 살든 홀로서기는 개인의 의지다.
가장 돌봐줘야 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였는데 나와 친하지 못하니 나와 있는 게 불편했다. 어색한 사이라서 숨막혔다. 내가 나와 친하지 않은 게 나의 홀로서기를 방해했다.